[금요칼럼]오세정/진정 청산해야 할 과거

  • 입력 2004년 8월 26일 18시 59분


코멘트
한동안 사람들을 지치게 했던 무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정치권의 과거사 논쟁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대통령과 여당은 올바른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진실규명과 화해가 필요하다며 친일행위를 비롯한 과거사 청산작업에 나섰고, 이에 대해 야당인 한나라당은 친북 용공행위도 함께 조사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이러한 논란 중에 열린우리당의 신기남 의원은 부친의 일본군 헌병 복무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 의장직을 사퇴했고,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여야 정치인들의 부친이 일제강점기에 면장을 했다거나 금융조합 서기 출신이라는 등의 풍문이 유포되며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정쟁 일삼다 국권뺏긴 구한말▼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말한 대로 “밝힐 것은 밝히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진실이 밝혀져서 부끄러운 일이 있다 해도 회피할 일은 아니며, 진실의 토대 위에서만 과거와의 진정한 화해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여론재판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번 신기남 의원의 경우에도 당 의장직 사퇴의 결정적 계기는 그의 부친에게서 고문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60년이 넘은 사건에서 피해자들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 그리고 당사자는 고인이 되어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객관적 진실이 밝혀질 수 있는지 우려되는 것이다. 이처럼 허점투성이의 방법으로는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진실규명은 어렵고, 따라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면장이나 서기 등 중간관리직은 그 직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재산을 수탈했다면 몰라도 그 후손이 정치를 해서는 안될 만큼 민족에게 해를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그 자리를 원했고 일제의 입장에서나 민족 전체로 볼 때에는 누가 그 자리를 하건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벽주의자들은 모두가 저항해 중간관리직도 거부했더라면 민족 정기가 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40년 가까이 식민지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오히려 더 큰 책임은 국민을 그런 어려움 속에 밀어넣은 무능한 민족지도자들에게 있고, 우리가 진정으로 청산하고 절대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과거사는 세계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공리공담(空理空談)과 정쟁(政爭)으로 세월을 보내 국권까지 빼앗긴 한심한 구한말의 정치 풍토와 사회상이다.

지금 세계 각국은 세계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하고 있다. 특히 기술패권주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첨단기술 확보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 기술자들도 미국과 일본 등 기술선진국들 사이에서 우리의 살 틈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매일매일 들려오는 소식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게 한다.

한 예로 값싼 노동력만이 장점인 줄 알았던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기술개발을 해오고 있으며 한국의 주력산업을 깊이 침식하고 있다. 최근 한달 사이에만도 중국의 상하이자동차가 한국의 쌍용자동차를 인수했고, 신설 투자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하이닉스반도체는 최첨단 생산라인을 중국에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은 한국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 격차를 10년 정도에서 2, 3년으로 단축시킬 것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세계는 지금 기술전쟁중인데▼

이처럼 중요한 일이 있어도 정쟁에 눈이 팔린 국내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이나 대책이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마치 구한말 주변 열강이 한국의 주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도 우리 사회 지도층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깜깜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에사키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일 5가지를 들면서, 그 중 하나로 “꼭 필요하지 않은 일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사실 위대한 과학자와 시시한 과학자의 차이는 문제를 푸는 능력보다는 중요한 문제를 선택하는 지혜에 있다. 지금 이 시기에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정치권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오세정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물리학 sjoh@plaza.snu.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