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삶/동아시아론]요란한「구호」…빈약한「성찰」…

  • 입력 1997년 11월 15일 09시 27분


「21세기, 동양의 시대」. 동양의 부활을 알리는 깃발이 곳곳에 내걸리고 있다. 서양문명의 시대가 가고 동양문명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낙관론이다. 당사자인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동양문화 동양사상의 신비에 매료돼 동양을 알고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동양적, 동아시아적인 것」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뿐 아니라 「21세기 동양사상」을 주제로 한 학계의 논의가 봇물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른바 동양 동아시아(중심)론. 과연 어떻게 탄생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가. 우선 서양문명의 위기에서 그 사상적 문화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위기에 처한 서양문명의 탈출구를 동양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로 서구의 근대적 이성, 이분법적 세계관(서구는 중심이고 동양은 주변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확산되면서 동양으로 시선이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서구중심의 동양관을 비판하고 동양적 시각에서 동양을 보려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도 물론 중요한 배경이다. 동양은 이러한 세계적 추세를 살려 서양의 신화에 함몰됐던 동양을 복권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정치적 경제적 배경도 빼놓을 수 없다. 냉전 종식,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동양의 실력회복, 특히 동아시아가 세계사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는 현상은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핵심은 바로 동아시아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최근엔 중국까지 동아시아국가가 자본주의에 성공하자 전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성장을 가져온 「신비스런 정신적 힘」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을 탐색하는 작업이 동양 동아시아론의 한 축인 셈이다. 이 점에서 동양중심론은 동아시아론으로 좁혀도 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자연 생명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의 노장사상이 물질문명으로 야기된 생태계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동아시아론을 부추기고 있다. 80년대말∼90년대 들어 활발해진 국내의 동양 동아시아론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한국이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21세기 세계사를 주도할 가능성에 대한 논의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핵심이 빠진 공허한 동어반복같은 인상이다. 한국의 유교 불교 도교가 왜 경쟁력을 갖는지, 어떻게 21세기 현실에 적용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없다. 「21세기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 같은 결론만이 나부낄 뿐. 따라서 비판이 없을 수 없다. 특히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상상」 「전통과현대」 등 계간문예학술지들은 최근 동아시아론에 대해 냉정하고도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들의 첫번째 지적. 동아시아 논의가 과연 우리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나온 것인가. 경제적 탈출구를 찾으려고 미국이 퍼뜨린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시대」라는 말에 우리가 너무 쉽게 현혹된 것은 아닌지 반성하라고 촉구한다. 아울러 서구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나 오리엔탈리즘조차도 동양을 제대로 보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극히 전술적인 것이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둘째, 우리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려는 욕망이 앞서다보니 동양 동아시아 찬양의 「자기최면」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공동체윤리, 대립보다는 조화, 가족주의 혈연주의 등이 모두 동아시아에만 있다는 착각에 빠져선 안된다. 우리가 자칫 동아시아라는 또하나의 신비를 만들어 스스로 그 안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최종덕 상지대교수(철학)는 『서구의 기술문명 자연과학을 무시해선 안된다. 이미 떠난 기술과학의 버스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셋째, 동아시아를 말하면서도 실은 한국 중국 일본 3국에만 국한시켜 또다른 제국주의를 형성하는 것은 아닌지. 서구의 지배론을 벗어나려 하면서도 새로운 지배론을 꾸미는 모순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넷째, 중국과 일본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부족. 그들이 과연 동아시아의 평등한 국제질서를 추구할 것인가. 다섯째, 동아시아의 공통점, 즉 동아시아적인 것의 실체도 명확하지 않다. 유교와 한자문화권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지극히 피상적이고 낭만적인 논의에 불과하다. 이밖에도 유교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최근의 주장도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물론 이 논의가 우리에게 긍정적 계기와 힘을 준다는 사실엔 이견이 없다. 학술 문학예술 등의 분야에서 서구적 시각을 극복, 동양적인 의미를 찾기 위한 작업이 한창인 것도 동아시아론에 힘입은 바 크다. 문제는 앞으로의 방향. 이제 양에서 질로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정재서 이화여대교수(중문학)는 『문제제기의 단계를 넘어 유교 등과 같은 동양사상이 실생활에서 어떤 활용가치가 있는지, 어떤 힘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생활은 서구적인데 이론만 동양적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관념적 주관적인 이론의 성찬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논의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동아시아논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거품같은 오리엔탈리즘의 함정마저 극복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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