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신영]가난의 대물림과 건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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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광복 70주년을 맞아 최근 한 신문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 6831명을 대상으로 생활실태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공개했다. 1115명이 응답한 조사의 결과는 ‘독립운동가의 경제적 어려움이 심하다’는 기존 통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정도가 심했다. 전체의 4분의 3 이상이 월 개인소득 200만 원 미만을 벌었고, 100만 원 미만도 30%가 넘었다. 특히 주목을 끈 것은 가난의 대물림도 심하다는 대목이었다. 월 개인소득 200만 원 미만 비율은 독립운동가 본인보다도 오히려 자녀와 손자, 증손자녀에게서 훨씬 높았다. ‘가난이 가난을 낳는다’는 말이 딱 작동되고 있었다.

조사에서 하나 아쉬운 점은 건강 상태에 대한 항목이 없었다는 점이다. 조사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알아봤더라면 좀 더 충격적인 결과를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현대 과학과 의학은 가난이 후손에게 건강하지 못한 신체를 대물림하는 현상도 밝혀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유년기. 2012년 10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는 불편한 연구 결과가 소개됐다. 어릴 때 가난을 겪은 사람은 성인이 돼서도 면역력 저하에 따른 건강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였다. 어릴 적의 사회적, 경제적 상태가 평생 건강과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유년기를 넘어, 아예 태아 때 겪은 가난도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머니가 겪은 가난과 굶주림은 태아에게 강력한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이는 한창 크고 있는 초기 태아의 몸을 교란한다. 그 결과 태어난 뒤 다른 사람보다 수명이 짧아지거나(동물 실험을 통해 증명됐다), 당뇨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2세대인 자식만이 문제가 아니다. 최근에는 3세대인 손자까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1945년 겨울, 독일 나치는 자신들의 점령지였던 네덜란드 서부 지역의 식량과 연료 공급을 끊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영양실조로 고통을 겪었고, 그때 태어난 자식들은 저체중 증상과 당뇨, 조현병 등에 시달렸다. 문제는 그 자손인데, 일부 연구에 따르면 저체중 경향이 3세대인 그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북유럽에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음식을 충분히 섭취했는지 여부에 따라 손녀, 손자가 심혈관계 질환 및 당뇨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이 경우는 복잡해서, 오히려 지나치게 많이 먹을 때 사망률이 늘기도 했다).

오늘날 생명과학계는 이 현상을 ‘후성유전’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후성유전은 유전자(DNA)에 일종의 각인이 일어나 유전자에는 없던 추가 정보를 전달하는 생명 현상이다. ‘혈통’ 또는 ‘피’로 상징되던 유전자와 별개로, 가난이나 스트레스 같은 외부환경 역시 후세의 신체나 성격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고전소설에는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가문의 몰락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는 주인공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어려서 가난과 멸시로 고통받지만, 결국 자신의 ‘피’를 속이지 못하고 영웅이 된다. 하지만 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현실은 다르다. 제아무리 영웅의 피를 이어받았더라도 강력한 가난의 고리에 갇히면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그 자손마저 건강하지 못할 수 있다니 현실은 소설보다 더 비극적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설 수 있게 한 분들과 그 후손이 혹 이런 비극을 겪고 있다면 과연 이 땅에 정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독립운동가#가난#대물림#후성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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