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기껏 뽑아 키워놨더니”… 인재 잃은 기업들은 허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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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리는 왜 직장을 그만두나

“월급쟁이 생활이여, 안녕”

여행에서 돌아와 아예 직장생활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다. 강성찬 씨(32)는 2009년 다니던 회사를 1년여 만에 그만뒀다. 27세가 되던 해였다. 그가 당시 몸담았던 곳은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 IBM의 한국 법인이었다.

강 씨는 “많은 임원들은 저마다 성공한 삶을 사는 듯 보였다”며 “신입사원 교육 때만 해도 ‘이곳에 뼈를 묻겠다. 쉰 살에 최고경영자(CEO)가 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곤 했다”고 떠올렸다. 이랬던 그가 사표를 낸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떠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강 씨는 사표를 낸 지 석 달 뒤인 2009년 6월 세계여행을 떠나 8개월 동안 20여 개국을 돌아봤다. 그는 귀국해서도 직장을 다시 잡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처럼 직장을 떠난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등의 일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2011년에는 여행 기록을 담은 책 ‘방황해도 괜찮아’도 펴냈다. 강 씨는 “‘강성찬’이라는 톱니바퀴가 빠져도 얼마든지 다른 톱니바퀴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예 외국에 터를 잡은 이들도 있다. 김희영(32), 김혜리 씨(29·여) 부부는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체코에 정착했다. 이들은 2012년 12월부터 프라하에서 한인민박을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 김희영 씨는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출퇴근을 반복하는 내 모습이 마치 조류에 쓸려 다니는 표류 선박 같았다”며 “예전처럼 매달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오지도 않고 민박 관리부터 마케팅, 회계까지 책임져야 하지만 한국 생활보단 행복하다”고 전했다.

떠나고 싶은 직장인들

많은 직장인이 이들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꾼다. 동아일보는 온라인 교육업체 휴넷에 의뢰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봤다.

직장인 9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회사를 그만두고 2주 이상 장기 해외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이 86.6%였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오랫동안 일을 쉬고 싶어서’라는 의견이 43.4%로 가장 높았다. ‘해외에서 공부나 일 등 다른 기회를 찾으려고’(24.6%), ‘먼저 경험한 지인의 추천을 받아서’(8.2%)라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 회사를 그만두고 장기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 응답자(106명) 중 88.7%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장기 여행 뒤 달라진 점을 묻자 대다수가 ‘넓어진 견문’(45.3%)과 ‘삶의 여유’(39.6%)를 꼽았다.

이에 대해 성영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래보다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예전에는 직장에 다니면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개미처럼 일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운시프트(downshift)족’의 증가도 이러한 현상의 한 원인이다. 자동차 기어를 저속으로 바꾼다는 의미의 ‘다운시프트’에서 유래한 용어로 돈을 더 벌기 위해 빡빡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맘에 드는 일을 하며 느긋한 삶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뜻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Y세대의 일과 삶의 균형-세대별 일의 가치를 통해 본 의미 및 역할’ 보고서는 흥미롭다. Y세대는 현재 20, 30대인 1977∼1995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이들은 더이상 일을 위해 자신의 가정이나 삶에 대한 우선순위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의 행복보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희생했던 베이비붐 세대(1955∼1964년생)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는 과거와 달리 비교적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자란 덕분에 부모들처럼 가족을 책임지고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조금 덜한 편”이라며 “무게중심도 회사보다 자신에게 더 많이 두곤 한다”고 설명했다. 한때 젊은 직장인들이 자신의 스펙을 높이려는 수단으로 경영학석사(MBA) 등에 진학해 ‘성공의 디딤돌’로 삼았던 것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니던 직장을 실제로 그만두기란 쉽지 않다. 본보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59.5%는 사표를 내고 장기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떠나려고 할 때 가장 걱정되는 문제로 ‘새 직장 구하기’를 꼽았다. ‘비용 마련’(21.9%)이나 ‘가족 설득’(8.1%)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글로벌 헤드헌팅 기업 러셀레이놀즈의 고준 상무는 “미국 등에서는 이직 과정에서 연봉이 더 오르는 등 다양한 경력이 기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국내 기업들은 한 번 회사를 떠난 사람은 또 떠날 수 있다고 판단해 경력직보다는 공채로 들어온 신입사원을 좀 더 선호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떠나는 젊은 직원, 붙잡으려면

젊은 직원들을 떠나보내는 기업들은 고민이 깊다. 비용을 들여 교육을 시킨 뒤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즈음 직원이 회사를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해 국내 기업 355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의 교육 및 훈련에 평균 18.3개월, 1인당 비용은 약 6000만 원이 든다. 하지만 조기 퇴사한 신입사원 100명 중 80명은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기 전에 퇴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임들은 사내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것을 우려한다. 한 대기업 상무인 김모 씨(48)는 “우리가 신입사원일 땐 ‘회사의 성공이 곧 내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야근, 주말근무도 견뎌 왔는데 요즘 세대는 다른 것 같다”며 “잘못 꾸짖었다가는 사표를 낼까 봐 함부로 말도 못한다”고 혀를 찼다.

반면 젊은 직장인들은 “회사가 젊은 사원들의 불만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긴다”고 반박한다. 한 금융회사에 다니는 홍모 씨(28)는 “선임들은 일주일에 3, 4일은 야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며 “특별히 급한 일이 아닌데도 회사에 늦게까지 붙잡혀 있다 보니 오히려 일하고 싶은 의지가 감퇴하는 느낌”이라고 푸념했다.

전문가들은 젊은 직원들의 달라진 가치관을 기업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고준 상무는 “젊은 직장인들은 대학생 때부터 인턴생활 등을 통해 구글이나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 사례, 경영자의 리더십 등을 많이 보고 들은 세대”라며 “입사 뒤 합리적 의사결정보다는 선임자나 회사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모습을 볼 때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는 “세상을 주도하려는 창의적인 인재들이 대기업 입사를 꺼리고 벤처기업 등을 찾는 풍토를 기업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직원들이 스스로 자신의 회사를 다니고 싶은 직장으로 인식하도록 경영자들이 사내 문화를 바꾸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육아, 보육 등을 고민하는 직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업무 배정이나 경력 개발 과정에도 직원들의 의견을 좀 더 많이 반영하는 식으로 기업 문화가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영신 교수는 “개인의 발전과 변화 속도를 조직이 따라잡기는 어렵고, 대기업일수록 그 격차는 더욱 크다”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 갑갑하다고 느끼는 직원이 많아질수록 기업의 미래는 불확실해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일과 여가를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기업이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면 직원들의 생산성이 높아지는 한편 장기적으로 외부에 노출되는 기업의 이미지도 상승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창규 kyu@donga.com·강홍구 기자  
#월급쟁이#이직#직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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