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민화의 세계]위엄의 상징 기린, 익살꾼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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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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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의 세계<끝>기린도

[왼쪽] ‘기린도’(19세기, ‘기린·사
자도’ 2폭 중 1폭), 삼성미술
관 리움 소장, 종이에 채색,
56.7cm×139.7cm. 활기차
고 세련된 묘사에 운치 있는
구성으로 표현된 기린도다.
구름이 서려 있는 복숭아나무
의 상서로운 배경 아래 기린
가족이 노닐고 있다.[오른쪽] ‘기린도’(19세기), 일본
민예관 소장, 종이에 채색,
34.0cm×66.9cm. 기린이라
는 권위적인 소재를 민화 특
유의 익살스러운 형상, 따스
함이 깃든 배경, 그리고 맑고
밝은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왼쪽] ‘기린도’(19세기, ‘기린·사 자도’ 2폭 중 1폭), 삼성미술 관 리움 소장, 종이에 채색, 56.7cm×139.7cm. 활기차 고 세련된 묘사에 운치 있는 구성으로 표현된 기린도다. 구름이 서려 있는 복숭아나무 의 상서로운 배경 아래 기린 가족이 노닐고 있다.[오른쪽] ‘기린도’(19세기), 일본 민예관 소장, 종이에 채색, 34.0cm×66.9cm. 기린이라 는 권위적인 소재를 민화 특 유의 익살스러운 형상, 따스 함이 깃든 배경, 그리고 맑고 밝은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평안한 시절을 태평성대(太平聖代)라 한다. 예전에는 정치가 잘돼 태평성대가 되면 상서(祥瑞)로운 동물들이 출현한다고 했다. 정치의 감화가 동물에까지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린이 뛰놀고 봉황이 춤추며 거북이 기어가고 용이 날아다니는 식이다. 이 네 가지 상서로운 동물을 ‘사령(四靈)’이라 한다.

여기에서의 기린은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는 목이 긴 동물이 아니다. 중국 한나라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가 달려 있고 뿔은 하나다. 말발굽과 오색 털을 기린의 특징으로 들기도 한다. 기린은 성정이 온화하여 다른 짐승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꽃과 풀을 밟지도 않아 어진 동물, 즉 ‘인수(仁獸)’라 불린다. 철저히 동아시아 문화의 산물인 셈이다.

중국에서는 정치적 알레고리(allegory·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것에 빗대어 암시적으로 설명하는 방식)로도 기린을 활용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통치의 정통성을 홍보하는 데 기린을 내세웠고, 심지어 왕권을 탈취하는 수단으로 기린의 출현을 이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서경(西京·현재의 평양)에 기린각(麒麟閣)을 설치해 왕이 강의를 듣고 시를 짓는 공간으로 썼다. 조선시대에는 정비의 몸에서 출생한 적실 왕자(대군)가 기린 흉배를 달았고, 왕릉의 석물로 기린상을 배치했으며, 왕실 의식에서 기린 깃발을 앞세웠다.

기린은 실존했을까

기린이 실재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공자가 ‘춘추(春秋)’라는 역사서를 기술할 때다. 그는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서쪽에서 기린(麒麟)을 잡은 것을 보고, “난세에 인간에게 잘못 잡힌 것”이라며 “우리의 도(道)가 끝났다”고 한탄했다. 물론 기린의 출현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기린이 나타나면 조선에서 축하하는 사신을 보낼 정도로 드물고 상서로운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과 세종 때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기린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축하사절단을 보낸 기록이 있다.

유물 속의 동물이 천마인지 기린인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 사례도 있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에 그려진 ‘천마도’다. 발견 당시에는 이 말다래에 그려진 동물을 죽은 이의 영혼을 신선세계로 인도하는 천마로 보았지만, 최근 뿔의 존재와 사슴 몸의 표현을 들어 기린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금은 어느 한쪽을 편들기 어려울 정도로 두 의견이 팽팽하다. 그렇지만 둘 다 외형의 특징만을 따질 뿐, ‘왜 무덤 속 말다래에 그 그림이 그려졌는지’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기린도’는 사자도와 더불어 쌍폭 가리개로 제작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 정교한 채색, 운치 있는 구성 등으로 보아 궁중 회화이거나 궁중 화풍으로 그린 민화로 짐작된다. 화면 오른쪽 청록으로 채색된 바위 위에는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마도 중국의 여신인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신선세계의 ‘반도(蟠桃)’란 나무일 것이다. 뿔 하나에 사슴 몸, 쇠꼬리, 말발굽으로 이뤄진 기린의 몸에선 불꽃 모양의 기운이 솟아나고 있다. 그림의 기린들은 부모가 두 마리의 새끼를 돌보고 있는 가족이다. 원래 수컷인 기(麒)는 뿔이 있고 암컷인 린(麟)은 뿔이 없다. 그러나 이 그림에선 뿔이 아닌 색으로 암수를 구분했다. 청색은 기, 적색은 린으로 여겨진다.

상서로움에서 일상으로

일본민예관 소장 민화 ‘기린도’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표현적인 그림이다. 위엄 있는 기린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재밌고 친근한 모습의 기린이 등장했다. 유난히 큰 눈과 큰 뿔, 여기에 어울리지 않게 툭 튀어나온 송곳니의 표현은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웃음을 자아낸다. 아비를 빼닮은 새끼 기린은 귀엽기까지 하다. 그래도 기린의 머리에서 목을 거쳐 등을 타고 흐르는 곡선은 꽤 감각적이고, 점무늬의 패턴이 매우 독특하다. 민화다운 매력이다. 상서로운 동물의 기품 대신 사소하고 평범한 동물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배경은 더욱 파격적이다. 반도 같은 신선세계의 나무 대신 현실적 행복의 상징인 모란이 화면 가득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또 나비가 날아들며 다람쥐가 노닐고 있다. 권위적인 존재를 친근한 존재로 탈바꿈시킨 것도 모자라 공간마저 상서로운 곳에서 예사로운 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기린의 해학적인 표현, 나비와 모란의 애틋한 조화, 여기에 밝고 맑은 채색까지 곁들여지면서 그림은 행복의 향기로 가득 차 있다. 기린을 그렸지만 상서로움과는 거리가 먼, 일상의 풍경이다.

한 달 남짓이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만난다. 그가 누구든 간에 기린이 뛰놀고 봉황이 춤출 만큼 참된 정치를 펼치길 기대한다. 또 새 대통령이 권위로써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화처럼 서민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민화는 서민의 문화인 데다 미술계의 변방에 머물렀기에 적잖은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미술계의 ‘언더독’이었던 셈이죠. 하지만 대중문화가 사랑받는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던 민화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겁니다. 민화는 현대인의 취향을 골고루 반영합니다. 자유로운 상상력, 흥미로운 스토리, 익살스러운 해학을 담고 있죠. 최근엔 곳곳에서 민화 강좌가 열리고, 민화 작가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민화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사업 역시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우리 민화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저는 우리의 민화가 머지않아 ‘우키요에’(일본의 민화)처럼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날이 올 거라 확신합니다. 일 년 동안 명품 민화들을 통해 민화의 세계를 함께 향유한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amkakhwa@naver.com
#민화#기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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