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사람들]어머니가 일으켜 세우고 남편이 붙잡아주고… 정경화의 어머니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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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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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일으켜 세우고 남편이 붙잡아주고… 이제 스스로 날 지킨다

지난달 30일 오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가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에서 1983년부터 사용해 온 1735년산 과르네리우스 바이올린과 함께 사진 촬영에 응했다. 그는 이 바이올린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물려주기 전 ‘잠시 빌려 쓰는 악기’라고 말했다. 오른쪽은 1990년경의 ‘정 트리오(정명화-경화-명훈)’ 연주회 포스터.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지난달 30일 오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가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에서 1983년부터 사용해 온 1735년산 과르네리우스 바이올린과 함께 사진 촬영에 응했다. 그는 이 바이올린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물려주기 전 ‘잠시 빌려 쓰는 악기’라고 말했다. 오른쪽은 1990년경의 ‘정 트리오(정명화-경화-명훈)’ 연주회 포스터.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 무대에서 좌중을 휘어잡던 ‘여제(女帝)’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하지만 그때마다 그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니, 남편,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그 자신이었다. 기다려온 팬들이 떠올라서였을까.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3)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마음의 감옥’에서 꺼내 준 어머니

1966년 말. 네 살 터울의 작은언니 명화(첼리스트)와 1961년 뉴욕 유학길에 오른 경화는 오직 연습에만 매달렸다. 지독한 연습이었다. 13세에 줄리아드음악원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언제나 ‘천재’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 그였다. 그러나 10대 소녀가 감당하기엔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 19세가 될 때까지 반드시 연주자로 성공하겠노라고 부모님께 했던 약속은 스스로를 억눌렀다. 특히나 그 무렵은 언니와 떨어져 스승인 이반 갈라미안 교수의 조교 집에서 홀로 지내던 때였다. 마치 감옥에 갇힌 듯 숨이 막혔다. 이유 없이 팔까지 아파왔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제가 원하던 음악이 나오지가 않았어요.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죠. 정말 그만둬야겠다,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경화를 지켜낸 건 지금은 고인이 된 어머니 이원숙 씨였다. 워싱턴에서 식당을 하던 어머니는 열일을 제쳐두고 뉴욕으로 날아왔다. 그러고는 3개월 동안 경화 곁을 지켰다. 7남매 중 어머니를 이토록 오랜 시간 독차지한 것은 경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머니가 놓은 ‘주사’는 긍정적 마인드. “잘한다” “네 음악이 너무 좋다”는 진심 어린 칭찬은 경화를 다시 일깨웠다. 꼬인 실타래를 풀어낸 것처럼 그의 바이올린도 점차 힘을 얻어갔다. 그리고 1967년 5월 뉴욕의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당시까지 그 콩쿠르에서 여성이 1위를 한 것은 딱 한 번, 우승자의 나이는 29세였다. 겨우 열아홉이었던 동양인 소녀에게는 너무 벅찬 도전으로 여겨졌다. 갈라미안 교수마저도 “넌 너무 어려서 안 된다. 어림없다”고 했다. 이런 스승의 태도에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냈다. 출전을 말리는 스승과 강행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경화도 적잖이 갈등해야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갈라미안 교수에 대한 앙금을 지워버리지 못했다. 경화는 스승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그래서 더 모질게 채찍질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결론은 연습이었다. 열심히 해서 결과가 좋으면 모두에게 좋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10대의 첫 슬럼프를 버텨낸 경화는 그렇게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 30대의 방황, 그리고 남편과의 만남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었다. 1968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1970년 11월 영국 데카를 통해 데뷔 음반을 냈다. 동양에서 온 20대 여성의 현란한 연주에 전 세계가 열광했다. 연주 스케줄은 연간 120회나 됐다.

40도의 고열이 나는 상황에서도 그는 무대에 올랐다. 1971년 5월 한국 독주회 도중엔 맹장염 진단을 받고도 한약을 먹어가며 투어를 마쳤다. 그 직후 미국에서 열린 언니(명화)의 결혼식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마친 뒤에야 병원에 실려가 수술대에 올랐다.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었다.

20대 후반엔 집안 소개로 만난 사람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했다.

“저도 그 사람에게 너무 마음이 끌렸죠. 그런데 제가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당신이 누구라고 나한테 그러느냐,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느냐고 했어요. 참 당돌했죠. 그땐 내게 주어진 책임이 너무 커서 그걸 다 이루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바이올린에만 빠져 있었다. 바이올린 외의 다른 생각은 모두 사치라고 여겼다. 그런 그가 잠시 바이올린을 내려놓은 순간 시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1980년 9월. 바이올린을 손에 잡은 후 처음으로 그는 6개월의 휴가를 냈다. 파리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던 중 미국에 계신 아버지(고 정준채 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12월 23일 아버지는 가족의 곁을 떠났다. 어렵게 마음을 추스르고 ‘정 트리오(명화-경화-명훈)’ 공연을 마친 그는 또 한 번의 비보를 접한다. 1981년 4월 갈라미안 교수가 타계한 것이었다.

“제가 너무 쇼크를 받을까 봐 언니가 선생님이 돌아가신 걸 말을 안 해줬어요. 투어가 모두 끝난 뒤에야 알았죠.”

그해 5월에는 그의 매니저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졌다. 6개월 사이에 소중한 사람을 셋이나 잃은 그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대에는 올랐지만 정신적인 방황이 그칠 줄 몰랐다. 그러기를 3년. 그의 무대는 여전히 현란했지만 마음은 늘 무거웠다. 한 치의 허점도 보이고 싶지 않은 ‘완벽주의’ 탓에 주위의 시선은 그를 더욱 끝으로 내몰았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독일 유학을 고려하던 차에 또 한 명의 구원자가 손길을 내밀었다. 1983년 친구 소개로 만난 두 살 연상의 영국인, 오페라를 사랑하는 사업가 제프리 리케트였다. 그는 경화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신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듬해 결혼했다. 결혼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개인 정경화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줬다. 난생처음이었다. 남편이란 울타리와 2년 터울로 태어난 두 아들(재곤, 유진)은 그에게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줬다. 30대의 기나긴 방황은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져 갔다.

○ 절망에서 기적을 만들어 낸 자신

2005년 9월 23일 밤 서울 세종문화회관. 키로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로 돼 있던 그는 바이올린을 두고 무대에 올랐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통증 탓에 연주를 포기한다는 사과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무대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난해 5월이었다.

“제 커리어의 중반에 그랬으면 굉장히 당황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미 연주생활을 40년이나 한 후에 생긴 일이잖아요. 오히려 이 기회에 내 인생에 대한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는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죠.”(그는 2007년 줄리아드음악원 교수로 임용됐다.)

그랬다. 첫 슬럼프를 맞은 18세의 정경화와 지향점을 잃고 방황하던 30대 초반의 정경화, 그리고

50대 후반에 들어선 정경화는 분명 달랐다. 바이올린을 놓아야 하는 절망스러운 상황을 맞이한 그에게 가장 힘이 된 사람은 바로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자기 자신이었다. 비워내야 할 것을 비워냈고, 정리해야 할 것들은 과감하게 정리했다.

지난해 재기무대는 온전하지 않은 몸 상태에서 이뤄졌다. 세상은 ‘여제의 귀환’을 반겼지만 그 자신은 만족하지 못했다. 몸을 다시 추슬렀고, 10명이나 되던 제자들도 연주활동과 병행할 수 있을 만큼인 1, 2명으로 줄였다. 그리고 올해 7월 명화 언니와 함께 음악감독을 맡은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다시 무대에 올랐다. 결과는 대성공.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향후 연주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11월 중순 한국에 다시 돌아온 그는 19∼26일로 예정된 독주회 ‘She is back’(인천, 대전, 춘천, 서울)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에 앞서 13일에는 오랜만에 뭉친 정 트리오가 올 5월 작고한 어머니의 추모콘서트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연다.

그는 어려서부터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그에겐 분명한 사실이다. 더 완벽한 연주를 하지 못했다는 죄의식,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좀 더 잘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이 그를 항상 눌러왔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죄의식을 놓을 수 있게 됐단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됐고, 가끔 마음 한쪽에 뾰족한 부분이 드러나더라도 이제는 다독여줄 힘이 생겼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박수를 칠 준비만 하면 된다. 그녀가 돌아왔다(She is back). 늘 추구하던 그의 완벽한 모습 그대로.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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