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현모]세종의 길, 세조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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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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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을 보면 세조의 자질이 세종보다 결코 못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과 열띤 토론을 벌일 정도로 유학에 식견이 깊었으며 불교에 대한 이해 역시 넓었다. 무예실력도 출중해서 ‘달리는 아홉 마리 노루 중 여섯 마리를 일거에 활을 쏘아 잡을 정도’였다. 또 그는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井間譜)를 16정간으로 줄여 정대업(定大業)을 종묘제악에 실제 연주할 수 있게 했다. 한마디로 문무악(文武樂)의 자질을 고루 갖춘 군주였다. 그럼에도 세종만큼의 업적을 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즉위 과정의 정통성 결핍으로 지식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그가 ‘조선의 주공(周公)’이 되어주길 원했다. 즉, 어린 왕을 보필해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군자의 길을 걷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단종을 밀어내고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대다수 지식인은 죽음으로써 저항하거나(사육신)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다(생육신).

왕위에 오른 후 그가 술 없이는 신하를 거의 만나지 못한 점은 거기서 비롯된 열등감 때문일 수 있다. 세조실록에는 술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의 ‘설작(設酌)’이란 단어가 431건 나온다. 세종실록보다 열 배가량 많다. 장소도 다양했다. 경복궁의 집무실인 사정전에서는 주로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술자리를 열었고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서는 종친이나 공신을 위로하는 주연을 열었다. 궁궐 뒤쪽의 왕비 거처인 교태전에서도 술자리가 베풀어졌는데 한명회 등 최측근만을 초대했다. 왕과의 친밀도에 따라 술자리의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세조의 주석(酒席) 정치는 신하들과 책을 읽어가며 국사를 의논했던 세종의 경연(經筵) 정치와 대조를 이룬다.

집현전 vs 측근… 국정운영 판이

세조가 부왕에 못 미치는 결정적인 이유는 집현전이라는 싱크탱크를 폐지한 데 있다. 그는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는 데 분개해 집현전을 폐지했다. 주로 신숙주와 한명회 등 측근과 국정을 의논했다. 소수 측근을 데리고 일했던 세조는 집현전의 보좌를 받는 세종을 결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중에 예문관에 집현전 일의 일부를 맡기거나 홍문관을 새로 만들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어떻게 활용했나? 세종 즉위 초인 1420년에 세운 집현전의 핵심 업무는 크게 두 가지, 활발한 국정회의 이끌기와 국가의 기간(基幹)인재 육성이었다. 어전회의 수준이 곧 국력이라고 본 세종은 경연이라는 창의적 어전회의를 국정토론의 중심지로 만들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면서 회의를 이끌게 했다. 인문학 강좌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얻는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한 셈이다.

다음으로, 그간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집현전의 주요 책무 중 하나는 리더교육 기능이다. 세종은 집현전으로 하여금 국가고시를 주관해 우수인재를 선발하게 했고 사가독서제라는 심화학습 과정을 운용해 전문가를 양성했다. 변계량 등 당대 석학의 집중 지도를 받게 하기도 했다. 집현전 학사가 시대를 이끌 리더로서의 안목과 자질을 갖추게 된 것은 온전히 이런 노력 덕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싱크탱크가 있다. 1만여 명의 인력이 46개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일한다(2007년 기준). 연간 3조 원가량의 국가예산을 소요하지만 거기서 나온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집현전의 전통이 단절된 데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면 집현전의 전통이란 무엇인가.

첫째, 다양한 전공, 구성원의 오랜 상호교류이다. 집현전 학사는 재행(才行)과 문학이 있는 젊은 사람 중에서 뽑혔는데, 전체의 20%가량이 자연과학 계열이었다. 장영실의 매형이기도 한 김담, 유효통이 그 예다. 한마디로 전공이 다른 사람이 같이 밥 먹고, 10년 이상을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연구를 자극하며 창조적인 결실을 거뒀다.

흩어져 있는 씽크탱크 정비 필요

둘째, 연구와 정책의 유기적 연계다. 집현전 학사는 자기들의 노력이 곧 정책에 반영된다는 높은 긴장감 속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실제로 세종은 집현전의 정책보고서가 올라오면 담당 실무자의 검토를 거쳐 대부분 실행했다. 경복궁의 사정전 바로 옆에 집현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싱크탱크가 최고 통치자 지근(至近)거리에 있어야 하고 동시에 연구결과를 그때그때 활용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흩어진 싱크탱크를 정비하고 집현전화해야 한다. 결과를 압박하기보다 연구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느끼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흔히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말하지만 이는 부정확하다. 평시에 영웅 재목을 기르지 않는다면 위기 시에 영웅이 결코 나올 수 없다. 집현전 설립 590주년인 올해, ‘대한민국 집현전’ 만들기를 제안한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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