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한국역사]<1>고구려의 민족적 계보

  • 입력 2007년 3월 3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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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지안시 고구려 다섯투구무덤 4호묘 벽화에 등장하는 해신(오른쪽)과 월신.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 지린성 지안시 고구려 다섯투구무덤 4호묘 벽화에 등장하는 해신(오른쪽)과 월신.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에선 천자(天子)만 독점했던 ‘하늘의 후손’이라는 제왕관과 중화질서와 차별되는 독자적 천하관을 보여 주는 고구려의 역사 기록이 적힌 동양 최대의 비석 광개토대왕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에선 천자(天子)만 독점했던 ‘하늘의 후손’이라는 제왕관과 중화질서와 차별되는 독자적 천하관을 보여 주는 고구려의 역사 기록이 적힌 동양 최대의 비석 광개토대왕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회학과 역사학의 접목을 통해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해 온 신용하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침략’에 맞서기 위한 우리 역사 되짚어보기를 펼친다. 신 교수는 2003년 본보에 ‘신용하의 새로 쓰는 한국문화’라는 연속 기획을 통해 ‘아리랑’의 어원이 ‘아리땁다’와 ‘마음이 아릴만큼 사무치게 그립다’는 뜻에서 나왔고, 설날의 어원은 ‘낯설다’가 아닌 ‘서다’에서 왔다는 참신한 주장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후속격인 이번 시리즈에서 신 교수는 코리아, 부여, 백두산, 독도,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大和) 등의 어원 분석을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의 허구성을 폭로하겠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이를 위해 한국사 연구의 시야를 한반도라는 협소한 공간에 묶어 두지 않고 만주, 몽골, 중앙아시아, 발칸 반도까지 과감히 확장할 예정이다.》

○ 중국 正史도 “고구려는 외국”… 동북공정은 자기부정

중국 사회과학원이 2007년 2월 ‘동북공정’을 마무리하면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결론을 만들고 이제는 이 주장을 학교교육, 관광사업, 대중교육 등에 확산시키고 있다.

이는 1차적으로 고구려의 민족적 계보 문제이다. 중국문헌 ‘후한서’ 예(濊)전은 “예, 구려 및 옥저는 모두 본래 조선(朝鮮)땅이었다”고 기록했다. 고구려를 고조선 계열로 기록한 것이다.

중국 25개 왕조의 정사인 ‘이십오사(二十五史)’는 고구려를 외국이라고 반드시 ‘외사(外史)’에 넣어서 동이(東夷)나 북이(北夷)편에서 간단히 외교관계만 기록했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는 망상하지 않고 완전히 ‘외국’으로 간주한 것이다.

한국 고문헌도 모두 고구려를 고조선과 부여 계열 국가로 기록했다. ‘삼국유사’ 왕력편은 “동명왕은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기록했다.

고조선(단군 조선) 왕의 독특한 호칭인 단군(檀君)은 뜻으로 풀면 ‘밝달 임금’이고, 음을 취하면 천왕(天王), 천제(天帝)의 뜻이다. 단군은 제1대 단군에게만 고유명사처럼 쓰였고, 나머지는 천왕·천제란 뜻의 보통명사였다. ‘삼국유사’에서 “동명왕은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한 것은 “주몽은 고조선 왕족의 후예이다”라는 뜻이다.

가장 명백한 증거자료는 고구려 당시의 기록과 유물이다. 당시의 ‘광개토대왕(호태왕)비’ 비문에는 시조 주몽은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라고 했다. 이때 천제는 단순한 하느님(上帝)이 아니라 고조선의 단군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주몽이 고조선의 왕족 계보임을 밝힌 것이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할 때 엄리대수 강을 만나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울부짖으며 구원을 호소했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도 주몽이 고조선 왕족계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북부여 사람들이 주몽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불렀다고 했는데, 번역하면 그 뜻은 ‘고조선 왕족 청년’이라는 뜻이다.

종래 주목하지 않았던 고고유물의 증거도 있다. 필자가 10여 년 전 답사 때, 장수왕릉(장군총)의 정면에서 후미 우단 측에 당시 원형대로 만든 고인돌이 남아 있어 장수왕(고구려왕)이 고조선 후예임을 밝혀 주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릉은 광개토대왕비의 근거리에 폐총이 되어 있었는데, 관을 넣는 왕릉 정상은 꺼져 내려앉아 허리를 굽혀 간신히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광개토대왕릉에도 후미 우단에 별도로 당시의 고인돌이 남아 있어서, 광개토대왕이 고조선 왕족 후예임을 밝혀 주고 있었다. 고인돌이 고조선의 독특한 무덤 양식임은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면 고구려 백성은 어느 계열인가? 민족 판별의 과학적 지표는 첫째 언어이다. 고구려 언어가 중국어 계열인가 조선어 계열인가의 판별로 이를 알 수 있다.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백제는 언어와 복장이 대략 고구려와 같다”고 했다. 백제말은 현재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말의 고대어이다. 고구려말도 이와 같은 것이다. 고구려말은 현대 한국어의 고대어 중 하나이다.

○ 백제와 언어 같은 고구려가 中의 지방 정권이라니

백제말이 중국말과 같지 않고 고구려말과 같다고 기록한 것은 백제말과 고구려말이 다함께 고대 한국말이며, 고구려의 민족적 계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한국민족(조선민족) 고대국가의 하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가 독립국가가 아니고 중국의 한 군현이거나 지방정권이었을까? 고구려는 강성하여 중국 고대국가들도 두려워했던 당당한 독립국가였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고구려가 수나라에 신복(臣服)하지 않는다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을지문덕에게 완패하여 수나라 병사 수십만이 죽고 1만여 명이 고구려에 포로로 잡혔다. 수나라는 이 패전이 주원인이 되어 멸망했다.

뒤를 이은 당(唐)의 고조(高祖)는 서기 62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공식 편지를 보내어 포로송환을 요청했다. 이때 당나라는 고구려를 자기의 지방정권이라고 간주했을까? 그와 반대다. ‘구당서(舊唐書)’에 수록되어 있는 당 고조의 공문편지에는 “이제 두 나라(고구려와 당)가 화친을 통하게 되었으니(今二國通和)”라고 시작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때 당 고조가 고구려를 당나라의 일개 지방정권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당과 고구려가 대등한 두 개 독립국가로서 화친을 하게 되었음을 공문으로 기록하고, 이것을 ‘구당서’에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 코리아 명칭의 기원은 고구려… 한국민족 증거

한(漢)의 고조(高祖)는 흉노가 막강해지자 흉노에 대해 한을 ‘흉노의 신하’라고 스스로 칭신(稱臣)하고 공주 등을 바치며 굴욕외교를 했는데, 그렇다고 한나라를 흉노의 지방정권이라거나 한나라를 독립국가가 아니라고 볼 수 없고, 또 그렇게 기록한 중국 고대역사가도 없다. 그런데 중국 역사가들은 중국 왕조들과 각종 친선관계만 맺으면 ‘책봉조공(冊封朝貢)’이니 무어니 하면서 다른 나라를 복속관계로 꾸며서 기록했다. 강성했던 고구려는 중국계열 왕조들이 이런 외교양식을 강요할 경우 대부분 무시했다.

한국은 세계 속 명칭이 코리아(Corea, Korea)이다. 코리아의 명칭은 고구려에서 나왔다. 고구려를 중국에서는 당시에 대부분 고려(高麗)라고 불렀다. ‘이십오사’ 같은 정사에도 고구려를 3분의 2는 ‘고려’라고 쓰고 3분의 1만 ‘고구려’라고 기록했다. 고려의 현재 중국어 발음은 ‘카오리’지만 고대 발음은 ‘코리(Kori, Kor~ee)’이다.

돌궐(투르크)민족이 중국 북방을 지배하다가, 서방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등 유럽에 진출했는데, 투르크족에 의해 서방세계에 육로로 ‘코리아’가 먼저 알려졌다.

8세기 전반기에 세워진 오르혼 돌궐비문에 ‘맥(밝)코리’라는 나라가 나온다. 이것은 ‘맥족(밝달족) 고구려’의 준말로서, 투르크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고구려를 ‘코리’로 서쪽세계에 알렸다.

이어 10세기 초에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정하고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했다가, 이를 줄여 고려(高麗)로 바꾸었다. 고려는 해상무역을 발전시켜 남송을 거쳐 동남아와 아랍세계와 무역을 했는데, 이때 ‘코리아’가 해상무역로를 통하여 다시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므로 ‘코리아’의 명칭은 고구려나 고려가 ‘코리아’로 변천된 것이며, 코리아의 명칭 기원은 ‘고구려’이다.

민족적 계보와 언어·문화는 물론이요, 국가와 민족 명칭에서도 고구려는 한국민족의 고대국가임이 불을 보듯 명백한 것이다.

한국 국민과 정부는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주장이 ‘코리아’의 기원까지 빼앗으려는 ‘역사침략’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장래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역사침략에 당당하고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중국 당국은 종래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저우언라이(周恩來) 시기에도 없었던 이 무지몽매한 동북공정 및 일부 중국 역사학자의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침략사관 망상과 ‘역사침략’을 반드시 폐기해야 할 것이다.

신용하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신용하 교수는

△1961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업 △1964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하버드대 역사학 및 극동어 박사과정 수료 △1975년 서울대 문학박사(사회학) △1975∼2003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사회사, 사회사상사) △현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한성대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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