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에 감춘 비밀]애거서크리스티 11일의 실종

  • 입력 2000년 9월 27일 15시 19분


실종당시의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당시의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작가에게 어울리는 실종 사건 발생

에드거 앨런 포에 의해 추리소설이 탄생한 이래, 추리소설은 문학 가운데서 가장 하위의 장르로 천대받았다. 하지만 추리문학의 매력은 세계의 독자들을 한순간에 사로잡았고, 그것은 특히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혹은 수사관의 카리스마에서 나왔다. 포가 최초의 추리소설 《모르그가의 살인》에서 뒤팽을 창조한 후 《도둑 맞은 편지》, 《황금벌레》 등에 출연시킨 이래 많은 작가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설에서 독특한 개성의 수사관을 창조했다.

괴팍한 독신주의자이며, 화학실험과 바이올린 연주라는 어울리지 않는 취미를 즐기던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나 뜨개질을 즐기는 전형적인 영국 노부인 미스 마플, 변호사 겸 작가였던 얼 스탠리 가드너의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와 그의 비서 델라 스트리트, 그리고 형사 전문 변호사 페리메이슨 트리오 등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명탐정이다. 사촌형제가 공동창작하고 붙인 필명 앨러리 퀸은 작품 속에서 이름 그대로 활약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는 회색 뇌세포의 탐정으로 이름이 높다. 키 162.5cm의 벨기에인 탐정은 빳빳한 수염과 항상 우아한 복장을 하는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특이하게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얼굴은 86세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온갖 미스테리한 살인사건을 다룬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화하다. 하지만 그녀의 일생에도 추리 작가에 어울리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버려진 자동차와 갈색 모피코트

▲뉴랜드의 '고요한 호수'

애거서 크리스티가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1926년 12월 1일. 그녀가 타고 나갔던 자동차는 버크셔의 뉴랜드 길 한쪽에서 발견됐는데, 차체에는 서리가 앉아 있었고, 갈색 모피코트와 작은 화장백이 버려져 있었다. 몇 가지 의류와 기한을 넘긴 운전면허증도 발견됐다. 그녀의 실종이 12월 3일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영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신문은 '신진 여류 작가의 의문의 실종'이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인 보도를 했고, 1만5천여명의 자원봉사자와 4개군의 경찰관이 그녀를 찾기 위해 동원됐다.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미스테리한 이 실종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여러 가지 가설을 낳았다. 한결같이 그녀의 작품을 근거로 한 것들이었다. 경찰조차도 그녀의 작품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했다. 경찰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찾은 곳은 차가 발견된 뉴랜드 부근의 '고요한 호수(silent pool)'.

이곳에는 설화도 얽혀 있어 신비함을 더했다. 옛날 한 왕이 '고요한 호수' 부근에서 수렵을 하다가 나뭇꾼의 딸이 그 호수에서 목욕하는 것을 보았는데, 왕에게 알몸을 보인 처녀는 수치심으로 호수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오빠가 동생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함께 물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는 이 전설 때문에 사람들은 호수에 밑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티의 작품 속에서 비슷한 풍경의 호수에서 익사체가 발견된다는 얘기가 있다. 경찰과 크리스티의 추종자들은 그녀가 그곳에서 익사체로 발견될까 마음을 졸였다. 5백명의 경찰이 호수를 바닥까지 뒤졌지만 그때까지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그 호수에는 밑이 있다는 사실만 밝혀냈을 뿐 크리스티 실종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남편과 정부를 살인자로 만드는 자작극?

크리스티는 실종 11일만인 12월 11일 요크셔 지방의 해로게이트의 한 호텔에서 발견됐는데, 숙박장부에는 테레사 닐이라는 이름으로 돼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 이름은 남편이었던 아치볼드의 정부와 같은 성이었다. 돌아온 그녀에 대해 남편이었던 아치볼드는 일시적인 기억상실이었다고 발표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받은 결과 빚어진 해프닝으로 받아들였다.

▲실종됐다 돌아오는 크리스티를 보기 위해 킹스 크로스역 플랫폼에 모여든 군중

하지만 바람난 남편을 골탕 먹이기 위해 추리소설을 쓰듯 치밀하게 계획한 계획극이라는 설도 제기됐다. 그런 가설은 추리작가 캐서린 타이넌의 《애거서》라는 작품에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가설이 사실이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가답게 바람 피운 남편과 정부를 살인자로 만드는 자작극을 스스로의 삶에서 구현해냈길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 영원히 실종된 유명 작가는 바람난 남편과 그 정부에 의해 아무도 몰래 살해된 것으로 됐을까. 그리고 남편과 정부를 감옥으로 보내고 완전히 다른 이름과 얼굴로 평온하게 살아갔을까. 이런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자레드 케이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에서 크리스티가 남편을 용의자로 지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단서를 만들어놓고 의도적으로 실종됐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실종 당시 남편이었던 아치볼드가 크리스티의 살해용의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크리스티는 그 사건에 대해 한번도 스스로 입을 연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미스테리는 점점 증폭돼 갔다. 진실은 이미 묘지에 잠들어버린 크리스티만이 알겠지만 추리문학 팬들은 그냥 흘려보내기 너무 아까운 작품 소재라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현주<북코스모스 기자>hyunjoo70@bookcosm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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