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100%최선 다한 실패는 성공의 보증수표

  • 입력 2009년 9월 5일 02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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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석 대장의 ‘극한 상황 의사 결정법’

모든 것 다바쳐 실패해야
진짜 내것으로 체화
‘퍼펙트 실패’엔 후회도 안생겨

산위에선 德將보다 猛將이 돼야
1초만 판단 늦어도 死神이 덮쳐

“어영부영한 성공보다는 실패가 100배 낫다. 실패할 때는 100% 최선을 다해 실패해야 한다.”

세계적인 산악인 박영석 대장(46·골드윈코리아 이사)은 8월 말 동아비즈니스리뷰(DBR)와의 인터뷰에서 “실패가 두려워 의사결정을 못해서는 안 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20여 년간 원정대를 이끌어온 박 대장이 들려주는 극한 상황에서의 ‘실전(實戰) 의사결정’ 기술은 동아비즈니스리뷰 41호 ‘의사결정의 기술’ 스페셜리포트에 실린다.

―탐험대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무법자다. 내 결정 하나로 전 대원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어려운 자리다. 원정대의 위계질서는 군대보다 엄격하다. 선배는 후배들한테 모든 것을 준다. 대장이 자기 것만 챙기면 ‘어떤 놈’이 목숨을 주면서 따라오겠나. 거긴 전시다. 몇 초 몇 분 안에 결정하고, 지시하고, 움직여야 한다. 산을 내려와 술 마실 땐 덕장(德將)이 통하지만, 산 위에서는 맹장(猛將)밖에 존재할 수 없다.”

―극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하다 보면 갈등이 생길 수 있을 텐데….

“무조건 명령하지는 않는다. 먼저 ‘이쪽 상황이 좋지 않으니 오른쪽으로 치고 넘어가면 어떨까’ 하고 팀원들의 의중을 떠본다. 하지만 결정은 내가 내린다. 리더가 믿음을 주지 못하면 대원들이 따라오지 않는다.”

―등반 성공률이 60% 이상이라고 들었다. 거꾸로 보면 40%의 실패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퍼펙트한 실패’를 하고 돌아설 땐 후회가 없다. 실패를 하더라도 100% 최선을 다했다면 그 실패가 내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실패로 이어진다. 뭐가 모자라 실패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후배들도 그걸 믿는다.”

―의사결정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례는 무엇인가.

“물론 대원들을 잃었을 때다. 뼈를 깎는 심정이다. 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도전했을 때 정상 공격에 나섰던 후배 둘을 눈사태로 잃었다. 10년간 한솥밥을 먹던 애들이었는데…. 시간에 쫓겼다. 위치도 나빴다. 날도 좋지 않았다. 캠프를 칠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골짜기니까 눈이 쓸려올 자리이긴 한데, 그때는 눈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밤은 거기서 때우라고 했다. 그런데 밤새 눈이 내렸다. 내가 있던 베이스캠프에서는 눈이 쓸려 내려오는지도 몰랐다. 대원들이 무전을 보내왔을 때, ‘텐트가 터질 위험이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했다. 대원들이 ‘신발을 신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무전이 끊겼다. 무전이 5분, 10분만 빨랐어도…. 빨리 내려오게 하든가 다른 쪽을 찾아보게 했어야 했다.”

박 대장이 이끌던 ‘2007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의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남서벽 해발 7700m 캠프 4에서 눈사태를 맞아 1200m를 추락한 끝에 유명을 달리했다. 두 대원의 시신은 신발 한쪽만 신은 채로 발견됐다.

―당시 충격으로 은퇴까지 고려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은퇴하면 더는 (대원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대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내자’고 후배들과 철석같이 약속했는데, 도망간다면 비겁자가 되고 평생 짐이 될 것만 같았다. 올해 5월 남서벽에 다시 도전해 성공했지만 기쁘지 않았다. 그저 후배들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뿐이었다.”

―첫 번째 북극점 도전에 실패했다.

“말로 들었던 것과 실제 가본 상황이 너무 달랐다. 지구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극일 것이다. 도전에 실패했을 때 ‘내가 이 징글징글한 곳에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처음이라 짐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진행도 더뎠다. 갑자기 항공 보급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60일 치 식량을 다 썼기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북극점 도전에서는 남은 식량을 버리는 과감한 의사결정을 했다.

“배수진을 쳤다. 보급품 무게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15일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실패냐 성공이냐, 딱 2가지 선택만 있었다. 식량과 연료를 절반 버리고, 마지막 도전을 결심했다. 밤낮없이 달렸다. 성공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더 지체되면 눈이 녹아 갈 수가 없었다. 북극점에 이르렀을 때 ‘이 지옥 같은 곳에 다시 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생명 줄과 같은 식량과 연료를 버리기로 했을 때 팀원들의 반응은 어땠나.

“거기까지 갔을 땐 100% 날 따라온다. 대장을 신뢰하고 믿으니깐. 재산은 말아먹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우린 아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신뢰가 쌓이지 않으면 전시에 부하들이 대장을 따르겠나. 모두 도망가지…. 하도 붙어사니까 후배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곧 짐을 쌀 친구인지를 알 수 있다.”

―극한 상황에선 시간도 촉박하고, 정보도 적고, 스트레스도 많다. 그런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리더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나.

“결단력이다. 그런 데서 질질 끌면 큰일 난다. 1초만 판단이 늦어도 사지에 떨어지는데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어디 있나. 난 내 자신을 믿는다. ‘당신의 멘터가 누구냐’라고 물으면 ‘나’라고 대답한다. 내가 날 못 믿는데, 어떻게 대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겠나.”

―극한 상황의 의사결정에서는 경험과 직관도 중요한 것 같다.

“판단과 동시에 행동이 나와야 한다. 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직관도 중요하다. 경험이 많은 리더는 바람과 구름 모양을 보고 날씨가 어떨 것이라고 예감한다. 개미도 홍수가 나기 전에 땅 위로 올라오지 않는가. 그건 거의 경험에서 나온다. 동물적 감각이 현장에선 살아난다.”

―자신을 너무 믿게 되면 독단에 빠져 반대 의견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결정을 사후 합리화할 수도 있다.

“글쎄. 이건 인간과의 머리싸움이 아니라 자연과의 싸움이니까. 난 8000m 이상만 40번을 등반했다. 거의 모든 상황을 맞닥뜨려봤으니 머뭇거리지 않고 결정한다. 과감한 어택(attack)보다 백(back)이 더 중요할 때도 많다. 정상이 100m밖에 남지 않았어도, 내려올 때 조난당할 수도 있다면 하산을 결정해야 한다. 8000m 높이에서 조난을 당하면 다른 구조자가 올 수도 없다. 내 발로 내려와야 한다. 대부분의 인사 사고는 내려올 때 일어난다.”

―원정대장의 의사결정 목표는 안전한 하산인가.

“이번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마지막 정상으로 갈 때 상황이 너무 나빴다. 그 순간 ‘아, 여기를 넘으면 퇴로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상에 올라 반대편으로 내려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내려가려면 무조건 정상에 올라야 하는 역설적 상황이 됐다. 다행히 시간은 늦어졌지만 무사히 하산했다. 반대편의 지리를 몰랐다면 그런 결정을 못했을 것이다.”

―‘어택’보다 ‘백’의 의사결정이 주효했던 적은 언제인가.

“정상을 200∼300m 앞두고 제트 기류 때문에 내려온 적이 있다. 더 버텼다면 날아갔을 것이다. 내년에 다시 오면 되니까. 산이 어디 가나,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지. 에베레스트 정상이 8848m인데, 8700m에서 돌아 내려온 적도 있다. 지금도 그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50m만 더 올라가면 남봉인데, 이미 손발이 얼어 감각이 없었다. 계속 올라갔다면 손발을 다 잘라야 했을 것이다. 다시 등반도 할 수 없었을 테고.”

―팀원은 어떻게 구성하나.

“팀원은 7명 내외다. 항상 모든 등반 준비가 다 돼 있다. 지금도 대형 마트 한 번 ‘털면’ 바로 출발할 수 있다. 후배를 키우기 위해 대학생 1, 2명씩 데려간다. 새 팀원을 뽑을 때 등반 능력은 안 본다. 그 대신 인간 됨됨이를 본다. 베푸는 마음, 여유, 더불어 사는 마음, ‘나’가 아닌 ‘우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을 쓴다.”

―젊은이들에게 해줄 얘기가 있다면….

“요샌 대학 산악회에 신입 대원들이 안 들어온다. 인복이 있어 지금까지 왔지만…. 선진국의 역사는 탐험의 역사다. 우리나라는 안주하려고만 한다. 외국에선 탐험가라고 하면 바로 ‘서(sir)’를 붙일 정도로 대접해주는데…. 난 산을 타는 1차적 탐험가다. 정보기술(IT), 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도 일종의 탐험가다. 어린이들이 우리를 보면서 개척의 꿈과 열정을 얻는다. 기성세대는 그걸 모른다. 신념도 없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정은 무엇인가.

“산악인의 길을 택한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택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이룬 업적이 많아도 하기 싫은 일이라면 잘못 선택한 것이다. 정치권에서 영입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산악인이 정치권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내 길은 아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 박영석 대장은 ▼

悶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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