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쁜 놈 쫓는 덜 나쁜 놈… 현실이 그렇지 않나요?”

  • 입력 2008년 1월 29일 02시 59분


영화 〈추격자〉 주연 김윤석

《김윤석은 어떤 역할을 맡든지, 캐릭터의 밑바닥까지 다 뽑아내는 배우다. ‘타짜’에서 ‘아귀’로 나왔을 때의 그 광기와 TV 아침 드라마 ‘있을 때 잘해’에서 바람을 피운 남편의 뻔뻔함이 그랬다. ‘즐거운 인생’에서 어깨 축 처진 중년 남자로 나왔을 땐 어찌나 측은하던지. 영화 ‘추격자’(2월 14일 개봉)의 그를 보곤 숨이 턱 밑에까지 차올랐다. 그는 죽도록 뛰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다. 전직 형사지만 비리에 연루돼 퇴직하고 출장안마소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엄중호 역할.》

아가씨들이 자꾸 없어져서 처음엔 도망간 줄 알았는데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에게 희생된 것을 알고 그를 추격한다.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시작하는 스릴러. 이 영화는 범인을 코앞에 두고, 심지어는 잡아 놓고도 혐의를 밝히지 못하는 상황을 통해 관객을 끝까지 애태운다. 28일 시사회 직후 그를 만났다.

―엄중호는 아픈 아가씨도 일하라고 불러내는 인간으로 선(善)이 아니다. 그가 악(惡)을 죽도록 추격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도 없다.

“이놈(중호)이 갑자기 어떤 도덕적인 성찰을 통해 사람을 구하려고 한다면 인위적이다. 살인마가 선을 넘은 자라면 중호는 간신히 선을 넘지 않은 자다. 이기주의나 물질만능주의에 빠졌던 인간이 선을 넘은 자, ‘거대한 벽’을 만나 충격을 받는 거다.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심, 인간의 존엄성이 있지 않나.”

―실제로 범죄를 목격한다면 뛰어들 자신이 있나.

“자신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나를 자극하며 쿡 찌르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지하철 선로에 뛰어내려 사람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건 순간이다. 생각할 여유도 없다.”

―엄청나게 뛰었겠다.

“처음 뛰는 장면만 일주일을 찍었다. 마지막 결투 장면은 40시간을 연속 촬영했다. 특수분장도 다시 해야 되고 자고 일어나서 하면 그 느낌이 안 날까봐. 찍고 나서 한잔하고 완전히 뻗었지. 이 정도의 액션은 처음이다. 사실 아귀 때는 폼만 잡지 않았나.(웃음)”

―모두들 연기에 대해 극찬하는데 부담스럽지 않은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아니, 아니다. 30대 초반이라면 몰라도 난 40대다. 그거보다는 영화를 보면서 ‘아,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를 안 남기려고 했다. 본인이 모자란 부분은 본인이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하더라도 소용없다.”

―엄중호가 아이(실종된 안마사의 아이)를 만나고 마음이 많이 흔들린다.

“감독은 최대한 나의 부성애를 드러내지 말라고, 냉정하게 대하라고 했다.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자꾸 아버지같이 보인다고 하더라.(2002년 결혼해 두 딸의 아빠인 그는 휴대전화 초기 화면에 있는 딸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허허’ 웃었다.)

―연극으로 시작해 20년 가까이 무명이었는데 고생한 얘기를 잘 안 하는 것 같다.

“고생을 안 했으니까. 고생을 뭘 해, 내가. 결혼했다면 몰라도 연극을 할 때는 혼자 살아서 견딜 만했다. 그때는 열정이 굉장해 단순하게 살았다. 일어나서 연습하고 공연하고 술 한잔하고 자고. 진짜 재밌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다.”

(이때 사진기자가 도착했다. 메이크업 담당자가 와서 얼굴에 분을 바르니 그는 메이크업 시간이 가장 싫다며 “얼굴을 남에게 맡기고 있는 이 시간을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는 것도 어색해했다.)

―차기작은 뭔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타짜 이후에는 정말 시나리오가 물밀듯이 들어왔는데 아귀와 비슷한 이미지의 역할이 많아 거절했다. 내가 악역을 왜 많이 하게 됐나 생각해 봤더니, ‘현실성’이더라. 뜬구름 잡는 착한 역할, 현실에 없는 로맨틱한 남자는 싫다. 너무 닳은 건가? 낯간지러워서 볼 수가 없다. 차라리 악인이 더 현실적이다. 사람이 미움의 대상이 되려면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만약 멜로를 한다면 냉정한 멜로,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멜로를 하고 싶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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