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 ‘선거개입 의혹’ 대통령이 말하지 않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1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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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가 7일 전격 공개한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사건’ 공소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 대통령의 30년 지기 송철호 울산시장 당선을 위해 대통령비서실 7개 조직과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 등은 순차 공모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했다.

처음 하명수사 의혹이 불거졌던 지난해 11월,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비서실장을 불러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우선 궁금해서라도 알아보는 게 상식이다).

대통령은 사실이 궁금하지 않다

하명수사 없었다는 보고를 받았다면 국민 앞에 그렇게 밝히면 된다. 관련 참모진은 부인하고 있는데 검찰이 철저히 수사해 진상을 규명하라고. 만일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다면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도 숨김없이 밝히고 국민 앞에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청와대가 “지극히 일상적 업무 처리”라고 자체조사 발표를 한 건 벌써 두 달 전 일이다. 그 후 공소장이 공개되고 국민 분노가 들끓으면, 혹시 비서실이 대통령을 속이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1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도, 11일 부처 업무보고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문 대통령이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다면, 이유는 한 가지라고 본다. 궁금하지 않은 것이다.

언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지난해 1월 17일 울산에서 열린 지역 경제행사에 참석해 전시를 둘러보는 문재인 대통령. 검찰은 대통령비서실 등이 2018년 울산시장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수사해 이를 기소했다. 동아일보DB
지난해 1월 17일 울산에서 열린 지역 경제행사에 참석해 전시를 둘러보는 문재인 대통령. 검찰은 대통령비서실 등이 2018년 울산시장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수사해 이를 기소했다. 동아일보DB

핵심은 문 대통령이 언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었느냐다. 공소장에 따르면 대통령의 복심 윤건영이 실장으로 있는 국정기획상황실도 선거 전에 9번, 선거 뒤 2번이나 보고를 받았다. 윤건영이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고 치자. 공소장엔 송철호가 2017년 10월 청와대를 방문해 임종석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만났다고 나와 있다.

“송철호는 대통령비서실장 임종석, 대통령비서실 내 사회수석비서관실 산하에 있으면서 보건복지 분야를 총괄하는 사회정책비서관 등을 만나 피고인 장환석(당시 균형발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에게 했던 같은 취지(산재모병원 예타 발표 연기와 공공병원 공약 수립)의 부탁을 했다.”

이날 송철호가 대통령까지 만났는지는 공소장에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청와대에 혼자 찾아온 오랜 절친을 대통령이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보냈다면 되레 이상하다.

“문재인 청와대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물론 공소장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볼 순 없다. 공소장은 어디까지나 검찰이 조사를 통해 파악한 혐의 내용일 뿐, 법원은 재판을 통해 검찰의 주장과 피고인의 변호 내용을 듣고 판단할 것이다.

불구속 기소된 청와대 보좌진 3인(백원우·장환석·한병도)의 변호인도 11일 “공소장은 법적요건을 구비하지 못한 검찰의 주관적인 의견서”라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대통령을 언급함으로써 대통령이 선거 개입에 관여했다는 인상을 줬다며 “촛불혁명 정부로서 선거왜곡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작년 12월 국민소통비서관 윤도한이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명언을 남긴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드루킹 댓글 조작 항소심과 관련해 지난달 김경수 경남지사의 유죄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던 차문호 재판장이 10일 돌연 교체됐다. 김경수가 댓글 조작프로그램 킹크랩을 봤다는 사실은 인정된다고 이례적으로 밝혔던 그가 선고를 앞두고 이례적으로 쫓겨난 거다. 이런 식이면, 더구나 7월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출범하면, 선거 개입 사건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된다고 장담할 수 있겠나.

“공공병원=산재모병원” 대통령은 안다

지난달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든 기자를 지목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동아일보DB
지난달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에서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든 기자를 지목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동아일보DB

돌이켜보면, 문 대통령은 선거 개입 의혹과 관련해 희한한 발언을 했다. 1월 14일 신년 회견에서다. “지난해부터 하명(수사) 의혹과 관련해 청와대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왔는데 대통령도 그 선상에서 보고 있는지, 공공병원 사업이 표류되지 않을지”를 묻는 질문에 “검찰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제가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도 이렇게 말한 것이다.

“공공병원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산재모병원’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타당성 평가라는 벽을 넘지 못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지난번에 정부가 각 지자체들로부터 의견을 들어 예타면제사업을 허용했는데, 산재모병원이 포함됨으로써 가능하게 됐다. 검찰은 그 과정에서 미흡한 일이 있지 않았느냐 하는 부분들을 수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김기현 전 울산시장이 추진했던 산재모병원과 송철호 현 시장의 선거공약인 공공병원이 같은 것임을 대통령은 알고 있다는 얘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통령은 묻지도 않은 ‘산재모병원’을 발설하고 말았다. 김기현의 산재모병원은 탈락했고 송철호의 산재모병원은 허용됐다. 같은 병원이 괜히 탈락됐다가 괜히 허용됐겠나.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기관은 우리나라에 하나뿐이다. 청.와.대.

“청와대가 범죄조직 운용한 셈”

어쩌면 비서실은 대통령을 기쁘게 하기 위해 깜짝쇼를 벌였을 지 모른다. 직속 부하들의 선거 개입을 대통령이 모르고 있다면 핫바지라는 얘기지만(더 중요한 다른 문제들은 제대로 보고받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보다는 낫다.

대통령이 알았든 몰랐든, 청와대의 선거 개입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의혹이 나왔다는 자체가 헌정사에 수치스러운 일임은 틀림없다. ‘공정한 선거관리의 총책임자’로서 대통령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대통령비서실이 국민에 심려를 끼친 데 대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깊이 사과한다”는 대통령 발언이 필요한 이유다.

2012년 이명박(MB)청와대의 민간인 사찰이 드러났을 당시 문 대통령은 “개인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청와대가 정부 안에 범죄조직을 운용한 셈”이라며 MB가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탄핵도 가능하다고 분명히 말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달 10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전국 지검장 및 선거 담당 부장검사 회의를 주재하기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이날 윤 총장은 “헌법 체제의 핵심인 자유민주주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선거 범죄를 엄중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동아일보DB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달 10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전국 지검장 및 선거 담당 부장검사 회의를 주재하기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이날 윤 총장은 “헌법 체제의 핵심인 자유민주주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선거 범죄를 엄중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동아일보DB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 공소장 공개로 인해 4월 총선에선 대통령비서실이 울산 선거처럼은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공소장은 “대통령비서실은…권한의 악용이 최대한 억제되도록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통제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이것만으로도 ‘윤석열 검찰’, 큰일을 했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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