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 전문기자의 아날로그 스포츠]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 “감독 하던 아빠가 더 좋아” 딸의 한마디가 인생항로 돌려놨죠!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3월 16일 05시 45분


정년이 보장된 직장생활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비정규직을 택했던 프로배구 도로공사의 김종민 감독. 지난 시즌 처음으로 맡았던 여자배구팀에서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이번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과시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아직 유니폼에 별이 없는 도로공사의 한을 풀어주려고 한다. 김천 ㅣ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정년이 보장된 직장생활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비정규직을 택했던 프로배구 도로공사의 김종민 감독. 지난 시즌 처음으로 맡았던 여자배구팀에서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이번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과시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아직 유니폼에 별이 없는 도로공사의 한을 풀어주려고 한다. 김천 ㅣ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결별

홧김에 뱉은 한마디 대한항공과 결별
책상 앞 본사 근무, 적성에 안맞았죠

#선택

마침 감독 제안한 여자배구 도로공사
40대 가장에게 비정규직 선택하기란…

#시련

부임 첫 시즌 꼴찌, 시행착오의 연속!
섬세한 여자선수들, 기다림 필요했죠

#반전

리그우승 모멘텀은 개막 3연패 시점
박정아가 공격을 전담 해준 게 컸어요

#믿음

첫 통합우승 도전…중요한건 평정심
지금 가장 두려운게 뭐냐고요? 회식!


43세 때 평생직장을 제 발로 박차고 나왔다. 치솟는 순간의 화를 참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내뱉은 분노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갔다.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만류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분노가 담긴 그 한마디를 내뱉은 대가를 스스로 치렀다.

그 뒤 2년이 지났다.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지금이라면 좀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볼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게 세월이 주는 지혜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귀와 입이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 완벽하지 않다. 항상 후회할 행동을 하고, 그리고 배운다. 그날의 한마디는 인생항로에서 변곡점이 됐다.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은 2016년 2월 11일 대한항공 감독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 발표가 나기 며칠 전 팀의 ‘봄배구’ 진출이 걸린 경기를 마친 뒤 구단 프런트와 쌓여왔던 갈등이 폭발했다. 탁구국가대표 감독 출신의 이유성 단장은 팀의 부진한 성적에 분노를 드러냈다. 한두 번은 못 본 척하고 넘어가기도 했지만, 그날은 도가 지나쳤다. 단장이 선수단에 했던 행동에 화가 났다. 그것을 외면하면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볼 낯이 없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구단 직원 신분(당시 차장)으로 감독을 맡았던 그는 그렇게 감독직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그를 기다리던 것은 본사 근무였다. 휴가를 신청하고 쉬면서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비록 신분은 달라지겠지만 꾹 참고 버티면 정년까지는 보장되는 훌륭한 직장이었다. 7개월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 번 경험도 했던 본사 근무였다. 문용관 감독 시절 코치로 일했던 그는 문 감독 퇴진 때 함께 물러나 본사 근무를 했다.

고향(울산)과 가까운 부산공항에서 일했다. “따분했다.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일이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운동선수가 현역에 물러나 평범한 직장을 선택할 때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따분함이다. 매일 매일이 다르고 활력이 넘치는 역동적인 스포츠 팀에서 오래 몸담고 있다보면, 안정을 중시하고 모든 일이 예고대로 오차 없이 반복되는 책상 앞의 생활은 심심해진다.

마침 러브콜이 왔다. 여자배구팀 도로공사에서 감독직을 제안했다. 그동안 남자배구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그로서는 고민이 될 법한 상황이었다. 평생직장을 포기하고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비정규직을 40대의 나이에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먼저 가족에게 물었다. 놀랍게도 아내가 찬성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딸의 말이 결정타였다. “나는 감독을 하던 아빠가 더 좋아.”

그는 결국 자신을 보호해주던 튼튼한 울타리를 박차고 나왔다. 비정규직을 택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 김천|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 김천|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누구나 시행착오는 한다!

처음 맡은 여자배구판은 생소했다. 같은 운동이지만 코트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여자선수들의 미묘한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힘들었다. 시행착오가 잇따랐다. 지난 시즌 도로공사가 꼴찌에 그친 이유다. 힘든 시간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동안 한 팀에서 원클럽맨으로 지내다보니 익숙함이라는 것에 시야가 많이 가려져 있었다. 새로운 변화에도 무뎌져 있었다. 일상 속에서 알지 못하고 놓친 것들을 새로운 환경에서 배웠다.

“솔직히 그전까지는 내가 어떤 감독인지 잘 몰랐다. 한 팀에서 선수, 코치, 감독을 하다보니 어떻게 감독을 하고 선수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2년간 도로공사 감독으로 새로운 인간형인 여자선수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정리한 내용은 이랬다.

“감독으로서 선수단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그 선수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결국 감독은 큰 그림을 그리고, 훈련을 통해 각자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 역량을 발휘할 것인지 관찰하고 판단해 디테일을 완성시켜야 한다. 훈련이나 경기를 해가면서 문제점이 드러나면 트레이드로 보완하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이런 다양한 퍼즐 맞추기를 통해 원하는 큰 그림을 시즌마다 정밀하게 완성하는 것이 감독의 일이다.”

스포츠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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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에서 온 남자감독·금성에서 온 여자선수

여자팀은 훈련방법부터 남자와는 달랐다. 남자선수들은 강도가 높아도 짧은 시간 집중해서 훈련하면 효과가 나타났지만, 여자선수들은 아니었다. 기량이 발전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남자선수보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였다. 남자선수들은 감독, 코치, 선수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위계질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시스템에 충성하지만, 여자선수들에게는 더 정교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김 감독은 그것을 ‘신뢰’라고 표현했다. “가장 먼저 선수들이 나를 믿게 만들어야 했다. 내가 했던 말은 반드시 지켜야 했고 서로 간에 많은 대화도 필요했다. 감독이 선수 위에 군림해도 안 되고,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 감독에게 질문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했다”고 정리했다.

그가 도로공사에서 첫 훈련 때 가장 놀란 것은 몸 풀기였다. 선수들에게 각자의 몸 상태에 맞춰 몸을 풀라고 지시했는데, 선수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감독, 코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만 했을 뿐 스스로 창의적인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포츠 현장에서 자주 지적하는 창의성 부족은 유소년 시절부터 어린 선수들에게 복종만 강요하고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고 개선점을 찾도록 하는 교육을 하지 않은 탓이다. 1년간의 호된 시련은 결국 약이 됐다.

도로공사 박정아. 스포츠동아DB
도로공사 박정아. 스포츠동아DB

● 우승팀을 만들어가는 과정

이번 시즌 도로공사가 통산 3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모멘텀은 개막 이후 3연패를 당하면서 나왔다. FA로 영입한 박정아가 포함된 3인 리시브시스템으로 시즌에 들어갔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감독이 내심 가장 우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반쪽짜리 공격전담선수보다는 리시브도 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며 돈 대신 도로공사를 택한 FA 박정아를 배려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 상황이라면 이기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김 감독은 결국 박정아와 면담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며 “수비를 줄이고 공격에만 전담하면 어떻겠느냐”고 의사를 물었다. 박정아는 ‘쿨하게’ 감독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김 감독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분명 앞으로 박정아는 수비, 특히 리시브 능력이 갈수록 좋아질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대로 두면 더 나빠질 것 같았다. 다행히 현재의 상황을 스스로 인정했다. 받아들여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밝혔다.

김 감독은 박정아가 국가대표팀 차출로 팀을 비울 때의 플랜B를 준비해뒀다. 리베로 임명옥과 문정원의 2인 리시브시스템으로 많은 훈련을 해뒀다. 그 결과가 바로 정규리그 우승이라는 열매다.

도로공사 문정원. 사진제공|KOVO
도로공사 문정원. 사진제공|KOVO

● 모두가 울었던 문정원의 리시브 훈련

이번 시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준 문정원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KOVO컵을 마치고 떠난 일본전지훈련에서 그는 리시브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일본 실업팀과의 경기에서 서브를 하나도 받아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진 날이 나왔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김 감독은 그 경기 후 잔인하리만치 리시브 훈련을 반복해서 시켰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외국인선수 이바나는 울었다. 전훈을 취재하러 온 방송사의 리포터도 훈련 장면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김 감독이 그런 이벤트를 통해 문정원에게 심어주고자 한 교훈은 확실했다. “본인이 스스로 문제점을 이겨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다행히 문정원은 감독의 메시지를 이해했고,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 사진제공|도로공사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 사진제공|도로공사

● 도로공사에 필요했던 것은 신뢰, 지금은 평정심

위기를 딛고 서로를 믿어가면서 조금씩 더 단단해진 도로공사는 지난해 12월 3일 선두에 오른 이후 단 한 번도 1위를 내주지 않고 통산 3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선수들이 고생했다. 서른아홉 살의 이효희부터 열아홉 살 막내까지 모두 예외 없이 훈련을 시켰다.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 순간 선수들이 경기에 지고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경기를 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선수들의 눈빛과 코트에서의 행동을 보면 ‘나를 믿는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그런 경기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결과 도로공사는 이번 시즌 홈에서 벌어진 IBK기업은행과의 2월 17일 6라운드 경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0-3 완패가 없었다. 그만큼 팀은 끈적끈적해졌다.

1차 관문을 통과한 그는 23일부터 통합우승을 향해 나선다. 김 감독 개인으로서는 2012∼2013시즌 남자부 삼성화재와의 챔피언 결정전 이후 2번째 우승 도전이다. 도로공사는 2014∼2015시즌, 2005∼2006시즌, 2005년 이후 통산 4번째 도전이다. 특히 V리그 원년인 2005년 모두가 우승을 기대했던 전력이지만, KT&G에 1승3패로 역전패 당했던 충격은 오래갔다. 당시 도로공사가 눈물을 흘리도록 만든 주인공이 바로 상대팀 주전 세터 이효희였다. 그래서 도로공사는 2014년 FA로 이효희를 영입했고, 결자해지를 노려왔다.

3일 도로공사의 정규리그 우승이 결정되던 날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오늘 하루만 즐기고 내일부터는 평정심을 유지하자. 챔프전 준비 잘하자”고 짧게 말했다. 도로공사는 아직 챔프전 우승 경험이 없는 유일한 여자팀이다. 만일 선수들에게 정규리그처럼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그 꿈은 이뤄질 수도 있다. 결국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스포츠기자로 31년째를 맞은 경험상, 이럴 때 가장 애를 태우고 조바심을 내는 쪽은 구단이다. 그래서 구단이 뭔가를 하려고 나서다 결과가 더 나빠진 사례를 많이 봤다. 김 감독도 이것을 가장 경계한다. 그에게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회식’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유가 대충 짐작됐다. 다음 기회에 그 이유는 설명하겠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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