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산성 목간의 ‘王子寧’은 ‘壬子年’으로 읽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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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환일 대전대 연구원 논문서 주장… “출토물 연도 592년으로 봐야”
학계선 “수긍 힘들어” 논란 예고

최근 경남 함안 성산산성 17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 기존에 ‘왕자녕’으로 해석된 앞쪽 세 글자(빨간색 실선)를 ‘임자년’으로 보는 주장이 새로 제기됐다. 만약 사실로 확인되면 성산산성 축성 시기는 6세기 말∼7세기 초로 늦춰 볼 수밖에 없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최근 경남 함안 성산산성 17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 기존에 ‘왕자녕’으로 해석된 앞쪽 세 글자(빨간색 실선)를 ‘임자년’으로 보는 주장이 새로 제기됐다. 만약 사실로 확인되면 성산산성 축성 시기는 6세기 말∼7세기 초로 늦춰 볼 수밖에 없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경남 함안 성산산성(城山山城) 출토 목간에서 연도(592년)가 확인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로 판명되면 성산산성은 6세기 말∼7세기 초 백제와 왜(倭)의 침공에 대비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신라가 아라가야를 멸망시킨 직후인 561년 무렵 대가야를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로 성산산성을 세웠다는 학계의 기존 견해와 다른 주장이다.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의미와 서체’ 논문에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지난달 공개한 목간 1점에서 ‘임자년(壬子年)’ 간지가 확인됐으며 이는 서기 592년(진평왕 14년)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지금껏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연도가 확인된 적은 없다.

앞서 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14∼2016년 성산산성 17차 발굴조사에서 목간 23점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王子寧(왕자녕)○○大村(대촌)○刀只(도지)’로 해석된 21번 목간을 손 책임연구원은 ‘壬子年(임자년)○○大村(대촌)○刀只(도지)’로 봤다. 본래 임자년으로 쓴 글자를 왕자녕으로 잘못 읽었다는 얘기다.

가로 4cm, 세로 22.7cm 크기의 이 목간은 뒷면에 쓰인 ‘米一石(쌀 한 섬)’ 글자를 고려할 때 물건의 꼬리표로 추정된다. 앞뒷면을 합쳐 보면 “임자년 ○○대촌의 ○도지가 쌀 한 섬을 보냈다” 정도로 해석된다.

여기서 임자년 간지는 6세기로 한정할 경우 532년 혹은 592년이 된다. 손 책임연구원은 “목간이 나온 부엽층에서 함께 나온 토기 양식을 감안할 때 592년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성산산성 출토 토기의 제작시기를 7세기 전반 이후로 보는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의 견해를 준용한 해석이다.

목간 연대가 592년이 맞는다면 성산산성 축성 시기는 빨라도 6세기 말 이후라는 결론이 나온다. 목간이 나온 부엽층은 축성 당시 목간 폐기물과 나뭇가지로 땅을 다진 곳이기 때문이다.

손 책임연구원은 6세기 말∼7세기 초 성산산성을 쌓은 배경으로 602년 백제 무왕이 왜와 동맹을 맺고 전북 남원 일대의 신라 영토를 공격한 ‘아막성 전투’를 들고 있다. 백제-왜의 협공에 맞서 신라가 성산산성을 쌓고 병력을 집결시킨 게 아니냐는 것이다.

임자년 주장에 대해 학계 일각은 수긍하기 힘들다는 분위기다. 성산산성 목간을 연구해온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필획으로 볼 때 녕(寧)자를 년(年)자로 판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목간을 발굴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적외선 사진 판독 결과 임자년으로 보기 힘들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다시 한 번 학술 자문회의를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성산산성 목간#왕자녕#임자년#손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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