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기획] 은퇴…이적…부활… 이효희 “포기하면 기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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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3월 13일 06시 40분


이효희. 스포츠동아DB
이효희. 스포츠동아DB
■ 서른다섯살 언니의 힘|도로공사 이효희 스토리

지난 7일 도로공사가 현대건설을 꺾고 정상에 섰다. 2005년 이후 10년 만에 차지한 정규리그 우승이다. 팀을 대표해서 트로피를 받은 외국인선수 니콜과 5라운드부터 부상당한 김해란을 대신했던 리베로 오지영은 시상식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효희는 생글거리고 있었다. V리그 11시즌 가운데 4번이나 정규리그 우승 팀의 주전세터로서 환희의 순간을 경험해서인지 여유가 넘쳤다. 어느 선수도 누려보지 못한 축복. 물론 시작은 미약했다. 20대 초반에는 웜업존에서 선배 언니들의 플레이를 보며 기약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참아냈다. 그때 포기했으면 지금의 기회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창 배구를 잘 할 때는 자신을 중심으로 팀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자만이었다. 2번의 이적으로 세상의 쓴맛도 봤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 서른에 배구와 이별도 했다. 절망 속에서 다시 잡은 기회. 그때부터 언니는 진짜 세상을 경험했고 배려를 배웠다. 그런 이효희를 사람들은 ‘우승청부사’라고 부른다. 서른다섯 살 언니에게 배구는 열정이고 여전히 뜨거운 사랑이고 세상을 경험하는 통로다.

후배에게 주전 밀리고…은퇴와 두번의 이적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31세에 혹독한 훈련
13∼14시즌 V리그 첫 세터출신 MVP로 부활
정규리그 우승 4회…인천AG 금 ‘우승청부사’

‘세터 교과서’로 정확하고 빠른 점프토스 일품
에이스 니콜과 많은 대화로 맞춤형 토스 척척
득점·공격성공률 높여 어메이징 세터 자리매김
이선구 감독·이숙자 위원 “한국 최고의 세터”

● 언니는 용감하게 더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갔다.

지난해 5월. 2014년 FA선수들의 계약시즌이었다. 원 소속구단과 우선협상을 마친 1차 FA협상마감 다음날 IBK기업은행 선수들의 숙소인 수원 한일타운 아파트 여기저기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팀의 큰 언니이자 이모 같은 존재였던 창단멤버 이효희가 팀을 옮긴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언니가 보낸 이별 문자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2009∼2010시즌을 끝으로 흥국생명에서 은퇴한 뒤 7개월째 놀고 있던 그에게 이정철 창단감독은 손을 내밀었다. KT&G의 김사니가 FA선수로 오면서 흥국생명은 이효희에게 플레잉코치를 제의했다. 한 살 어린 후배에게 2번이나 밀린 언니는 주전자리를 내놓기에는 아직 힘과 기량이 있다고 믿었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과 다시 시작했다.

서른한 살에 모든 것을 잊고 선택한 새 출발. 혹독한 훈련을 했다. 그만두고픈 때도 많았지만 참고 버텼다. 그 덕분에 2번째 시즌 만에 IBK는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2013∼214시즌도 화려했다. 정규리그 1위를 또 차지했다. 이효희는 시즌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이정철 감독은 “우리 팀에서 가장 수고한 선수”라며 취재진을 만날 때마다 칭찬했다. V리그 10시즌 만에 처음 나온 세터출신 MVP. IBK는 정규직 직원자리까지 약속했다. 그래서 누구도 이적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언니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섰다. 34세 때였다. 그 속내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인생은 끝없는 도전이고 나이는 관계가 없었다. 언니는 도전을 선택했다.

● 언니는 아파서 남몰래 은퇴를 생각한 적도 있다.

서른넷에 다시 대표팀 유니폼도 입었다. 2014인천아시안게임대표팀 이선구 감독은 베테랑의 능력을 믿었다. “현재 한국 최고의 세터”라고 했다. 대표팀의 원정에 참가했다가 부상도 당했지만 열심히 했다. 그 덕분에 1994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 이어 20년 만에 한국여자배구에 금메달을 안겼다. 언니는 “참고 기다리다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 온다”며 활짝 웃었다.

인천아시안게임을 마치자마자 새 소속팀 도로공사로 돌아왔다. 시즌 개막까지 준비기간이 너무 짧았다.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효희와 정대영을 영입해 우승후보로 평가받던 도로공사의 출발은 불안했다. 이효희의 고민은 2라운드까지 이어졌다. 세터는 팀에서 엄마역할이다. 엄마가 차린 맛있는 밥상처럼 공격수의 입맛에 맞는 토스를 올려줘야 한다.

아쉽게도 엄마는 팀이 필요한 시기에 없었고 결정적으로 많이 아팠다. 오른 무릎 부상은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아시안게임과 시즌개막 사이의 간격이 짧다보니 방법도 없었다. 참고 훈련하고 경기장에 나섰지만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너무 아파서 배구를 포기하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빨리 뛰어가서 공 밑에서 토스를 해야 하는데 무릎이 아프다보니 뛰어가는 것이 늦었고 토스도 정확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V리그 10번의 시즌 동안 4번의 유니폼을 바꿔 입고 4번의 정규리그 우승을 경험한 이효희. 2014∼2015시즌 최고의 세터답게 절묘한 분배와 정확한 토스, 배려와 감사로 새 소속팀 도로공사에 10년만의 정규리그 우승을 안겼다. GS칼텍스전에서 2단연결을 하고 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V리그 10번의 시즌 동안 4번의 유니폼을 바꿔 입고 4번의 정규리그 우승을 경험한 이효희. 2014∼2015시즌 최고의 세터답게 절묘한 분배와 정확한 토스, 배려와 감사로 새 소속팀 도로공사에 10년만의 정규리그 우승을 안겼다. GS칼텍스전에서 2단연결을 하고 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 언니는 배려와 소통 절박함을 안다.

3라운드부터 이효희의 토스가 완벽해졌다. 신기하게도 부상이 사라진 뒤였다. “어느 날부터 통증이 사라졌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다. 그때부터 편하게 배구를 하고 있다”고 이효희는 말했다. 이후 도로공사는 9연승을 달렸다. 베테랑 장소연과 정대영이 함께 코트에 들어간 시기와 겹쳤다. 확실히 도로공사는 이효희의 팀이었다.

세터의 교과서 같은 빠른 발과 정확하고 빠른 점프토스 덕분에 쉽게 점수가 났다. 좋은 세터는 공격수를 만든다고 했다. 이효희와 한 방을 쓰던 문정원이 숨겨뒀던 기량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즌 도로공사의 질주가 이어지자 “왜 배구는 세터놀음이라고 하는지를 보여준다. 지난 시즌과 비교해서 선수구성이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득점과 공격성공률이 높아졌다. 모두 이효희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에이스 니콜과의 호흡도 좋았다. 서남원 감독은 초반 두 사람의 호흡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고민했다. 따로 두 사람 만의 시간을 갖게 해줬다. 같이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얘기하라고 했다. 공격수와 세터는 신뢰라는 탄탄한 기반이 있어야 성공확률이 높다. 이효희와 니콜은 많은 대화를 했다.

“높게 올려주는 공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니콜은 빠른 토스를 더 좋아했다. 나도 그게 더 편했다. 내 토스가 나빠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먼저 말해주는 등 세터를 편하게 해준다. 성격도 좋다. 가장 인성이 좋은 선수”라고 이효희는 칭찬했다. 지난 2시즌 동안 이재은 차희선 최윤옥의 토스를 소화했던 니콜은 우승 확정 뒤 언니를 “어메이징”이라고 했다. 언니의 토스가 없었다면 우승의 영광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니콜이 보내는 최고의 찬사였다.

베테랑은 배려도 알았다. 모처럼 코트에 들어오는 비주전, 막 프로데뷔전을 치르는 어린 후배들에게는 꼭 공격 기회를 줬다. 한 점이라도 기록한 뒤 웜업 존에 돌아가도록 배려했다. “그동안 고생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20점 이후에는 선배 장소연에게 많은 기회를 주며 베테랑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려고 했다. 7일 팀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하는 마지막 포인트의 영광도 선배 장소연에게 올려줬다. 그다운 배려였다.

대신 훈련은 엄격했다. 스파이크에 정성을 담지 않으면 따끔하게 지적했다. 훈련 때 어느 선수가 느슨하게 공격하자 즉시 혼을 냈다. 훈련장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경기장에는 더욱 기회가 없다는 것을 오랜 선수생활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 언니는 나보다 주변을 먼저 떠올리고 감사한다.

3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했다. 2005년 KT&G, 2008∼2009시즌 흥국생명, 2012∼2013시즌 IBK였다. 정규리그는 2008∼2009시즌 흥국생명부터 시작해 2012∼2015시즌까지 IBK기업은행∼도로공사에서 3시즌 연속으로 해냈다. 어느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성과다.

그때마다 이효희는 스포트라이트에서 비껴갔다. KT&G 때는 상대팀 도로공사의 자멸을 기억했다. 흥국생명 때는 김연경 덕분이라고 했다. IBK 때는 김희진 박정아 알레시아가 먼저 거론됐다. 이번 시즌은 다르다. 도로공사는 철저히 이효희에 특화된 팀이다.

지난 시즌 우승을 놓고 경쟁했던 KBSN 이숙자 해설위원은 “지금 6개 팀 세터 가운데 이효희가 가장 뛰어나다. 도로공사는 팀의 모든 플레이가 이효희에게 최적화되게 만들어져서 좋은 토스가 나온다”고 했다. 이효희는 그 동안의 성과를 모두 동료들에게 돌렸다.

“2005년은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을 잘 못할 것이다. 흥국생명 때는 김연경 덕을 많이 봤다. IBK 때도 마찬가지다. 좋은 공격수를 만나 세터로서 편했다. 도로공사는 수비가 좋다. 세터가 좋은 공격수를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수비 잘하는 선수를 만나는 것도 복이다. 김해란 오지영 황민경 문정원 등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이들이 좋은 패스를 해주면서 토스하기가 쉬워졌다”고 했다. 언니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구와 동료를 본다.

● 언니는 후배들의 인내를 응원한다.

서른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진짜 세상을 알았다. 사실 그 전까지는 성격도 까칠했다. 주변사람과 편히 지내지도 않았다. “흥국생명 때까지는 내가 젊었다고 생각했다. 성격대로 하고픈 대로 다 했다”고 기억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진짜 눈을 떴다.

“IBK때부터 철이 들었다. 나를 잡아야 했다.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화가 나도 누르고 흥분을 해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이때부터 언니는 진정한 세터가 됐다.

대부분의 여자선수들도 비슷한 사이클을 겪는다. 한창 때 후배들이 눈길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선수들도 서른을 넘어가면 부드러워진다. 나이가 주는 지혜와 엄마가 된 영향도 있다. 이효희는 아직 미혼이지만 조카들을 보면서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어린 조카들은 매일 경기장에 따라와서 이모를 응원한다.

뒤늦게 자신만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드러낸 이효희에게 후배들을 위한 충고를 부탁했다. “22∼23살 그때가 힘들다.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 학교에서는 자신이 최고였지만 프로는 다르다. 기다리면서 배워야 한다. 나도 웜업존에서 5년간 기다리면서 선배 언니의 플레이를 보고 배웠다. 그냥 생각 없이 있지 말고 내가 그 상황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지 연구하면서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 인생은 길다. 못 견딜 것 같은 그 순간을 넘겨야 비로소 좋은 때가 온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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