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기록원 손끝에 연봉 달렸다” 숫자에 울고 웃는 선수들

  • 입력 2007년 3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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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프로야구 선수 A는 기록원 사이에서 ‘괴물’로 불린다. 사연은 이렇다. 몇 해 전이다. A는 유격수 방면으로 빨랫줄 타구를 날렸다. 상대 유격수는 공을 잡다 놓친 뒤 급히 1루에 던졌으나 세이프. 이를 기록원이 실책으로 처리하자 A는 이닝이 바뀐 뒤 기록원실로 찾아와 발로 문짝을 부숴버렸다. “내 안타를 왜 날려버렸느냐”는 게 이유였다.

#장면 2. 투수 B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 기록원실에 들러 깍듯이 인사를 한다. “(기록 정리할 때) 신경 좀 써 달라”고 부탁도 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안타인지 실책인지 애매한 타구는 실책으로 기록해 달라는 것. 실책으로 내보낸 주자는 득점을 해도 비자책으로 간주돼 자신의 평균자책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기록에 울고 웃는다. 선수의 능력을 수치로 보여 주는 타율과 평균자책 등은 기록원의 판정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기록원들은 투수와 타자에게 가끔 항의와 회유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한번 결정된 기록은 거의 바뀌는 법이 없다. 경기장마다 기록원이 2명씩 배치돼 기록을 쌍방향 확인하기 때문이다.

○ 스타급 선수일수록 기록에 민감

기록원들은 “삼성 양준혁과 SK 박재홍, 롯데 손민한, 한화 최영필은 기록 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대표적인 선수”라고 꼽았다.

기록 판정에 이의가 있을 때 보통은 코치가 선수를 대신해 기록 수정을 요청하지만 이들은 본인이 직접 기록실을 찾기도 한다.

예전에는 윽박지르기 식으로 기록을 바꿔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아쉽다. 다음에 잘 봐 달라”는 식의 애교형으로 바뀌었다.

윤병웅 기록위원은 “선수가 기록에 예민한 것은 타율이나 평균자책이 연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기록에 집착하는 선수는 대부분 ‘스타급’이다. 김태선 기록위원은 “자신의 성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다. 이는 그가 진정한 프로임을 보여 주는 증거인 셈”이라고 말했다.

○ 같은 팀에서도 ‘실책’ ‘안타’ 놓고 갈등

같은 팀의 타격, 투수 코치가 기록실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도 한다. LG 중견수였던 이병규(현 주니치)가 잘 맞은 직선 타구를 한 번에 잡으려다 공이 뒤로 흘러 상대 타자는 2루까지 진루했다. 이를 놓고 기록실을 찾은 정삼흠(신일고 감독) 전 LG 투수코치는 ‘1안타 1실책’, 김용달 타격코치는 ‘2루타’라고 주장했다. 각각 투수의 평균자책이 올라가는 것과 야수의 실책을 막아주려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었다.

○ 개인 기록보다는 팀 성적이 중요

반면 자신의 기록에는 연연하지 않는 스타도 있다. 기록원들은 KIA 이종범과 두산 김동주를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대표적인 선수로 꼽았다.

윤병웅 기록위원은 “이종범의 경우 실력도 뛰어나지만 애매한 기록 판정이 나와도 항의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기록원들은 자신의 기록을 위해서건, 팀의 승리를 위해서건 최선을 다해 뛰는 선수는 ‘아름다운 프로’라고 입을 모았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 “야구史 우리가 쓴다”▼

KBO기록원 13명 올 한해 936경기 ‘밀착 마크’

공 한개마다 구질 - 진루상황 등 꼼꼼히 적어

“1년 중 절반은 지방을 떠돌아다녀야 합니다. 경조사는 챙길 수도 없고 아이들에게는 빵점 아빠죠. 하지만 야구가 좋으니 어쩝니까.”

한국야구위원회(KBO) 기록원은 자신의 손으로 프로야구의 역사를 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타석 바로 뒤 스탠드에서 투수가 공 한 개를 던질 때마다 스트라이크와 볼, 진루 상황 등을 꼼꼼히 정리한다.

기록지는 한눈에 경기의 흐름을 살필 수 있도록 도형과 로마자 등으로 꾸며진다. 스트라이크(○), 볼(·), 공중파울볼(△), 원아웃(Ⅰ), 투아웃(Ⅱ), 실책(E) 등.

KBO 기록원은 현재 13명. 이 중 8명은 1군 504경기를, 나머지 5명은 2군 432경기를 책임진다. 야구선수 출신이 4명이고 그 외는 오로지 야구가 좋아서 기록원이 됐다.

18년째 기록원으로 활동 중인 윤병웅 기록위원은 고교 3학년 때 야구 기록강습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말고사를 빼먹었을 정도로 열혈 야구 마니아다.

“한때 MBC(LG의 전신) 팬이었지만 이제는 좋아하는 팀이 없어요. 항상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기록자의 신분이기 때문이죠.”

고교야구 선수 출신인 김태선 기록위원은 팬들에게 1군보다는 2군 경기를 볼 것을 권했다. 1군에 비해 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온몸을 던지는 박진감 있는 경기가 펼쳐진다는 게 이유.

기록원들은 “많은 보수를 받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야구와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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