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회고록 출간]“YS가 대선자금 SOS… 3000억 모아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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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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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대선자금으로 3000억 원을 모아줬다고 주장했다. 10일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서다. 전체 회고록은 상하 2권으로 모두 1112쪽에 이른다. 다음은 회고록의 주요 내용.

○ “YS 대선자금 내가 모아줬다”


(통치)자금조성 창구는 청와대로 단일화했다. 자금관리는 보직이 잘 바뀌지 않는 측근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떠오른 인물이 이현우 경호실장이었다. 적잖은 통치자금이 치안유지 비용에 쓰였다.

1990년 초 3당 합당 이후 나는 당 운영비 외에 김영삼(YS),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들에게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보내주었다. YS에게는 두 분보다 많은 액수를 건넸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내가 대선자금 얘기를 꺼냈을 때 YS는 “적어도 4000억∼5000억 원은 들지 않겠느냐”고 했다.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1987년 내가 대통령 후보로 전 대통령에게 지원받은 선거자금은 1400억 원 규모였다. 여기에 당에서 모은 돈 500억 원을 합치면 2000억 원 정도였다.

기업사정을 잘 아는 금진호 장관과 이원조 의원을 불러 YS를 도와 대선을 치르라고 지시했다. 두 사람이 각각 1000억 원 정도의 기금을 조성해 주었다고 들었다. 대선 막바지에 YS로부터 자금이 모자란다는 SOS(긴급요청)를 받았다. 나는 금 장관을 통해 1000억 원을 보내주었다. 내가 김영삼 캠프의 선거자금 3000억 원을 조성해준 셈이다.

1993년 2월 25일 YS의 취임식장으로 떠나기 전 나는 청와대 금고 안에 100억 원 이상의 돈을 넣어 두게 했다. 남은 대선자금은 당선자(YS)에게 이야기해 처리하려고 했지만 그는 (청와대로) 찾아오지 않았다. 남은 자금을 후임자에게 전해주지 못한 채 퇴임했다.

○ “6·29선언은 내 작품”

1992년 당시 청와대에서 회갑잔치를 연 노태우 대통령(앞줄 오른쪽)과 김옥숙 여사. 뒷줄에 사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딸 소영 씨 가족, 아들 재헌 씨 가족이 보인다. 조선뉴스프레스 제공
1992년 당시 청와대에서 회갑잔치를 연 노태우 대통령(앞줄 오른쪽)과 김옥숙 여사. 뒷줄에 사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딸 소영 씨 가족, 아들 재헌 씨 가족이 보인다. 조선뉴스프레스 제공
1987년 6월 17일 안가 만찬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나는 카드를 다 썼다”고 했다. 이날 밤 집으로 돌아와 박철언 특보를 불렀다. 그때 준 지침은 두 가지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한다는 것과 김대중(DJ)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것이었다.

6월 24일 청와대로 올라갔다. 영식(令息·윗사람의 아들)인 재국 군도 동석했다. 전 대통령은 불쑥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 하고 내 의중을 떠봤다. 나는 선뜻 수긍하기보다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면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어법을 쓴 것인데 이 대목으로 인해 내가 직선제를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샀다.

○ 3당 합당

(여소야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YS와 DJ를 접촉했는데 YS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DJ는 부정적 자세를 견지했다.(※노 전 대통령은 DJ에 대해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992년) 대선 전 10월 5일 청와대 만찬 회동 때 (DJ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의 혜안에도 한계가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썼다.)

○ “김일성의 초청 거절”

1994년 1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오른쪽)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 노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이에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 있다. 동아일보DB
1994년 1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오른쪽)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 노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이에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 있다. 동아일보DB
김일성은 단 한 번 나를 북한에 초청했다. 1992년 봄 윤기복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이 김일성의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 초청 시기가 김일성의 생일(4월 15일)과 맞물려 있었다. 북한 측 비밀창구 역할을 해온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은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모양새를 구겨가면서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해 12월 23일 스티븐 솔라즈 미 하원의원이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길에 나를 예방했다. 그는 “북한 측 인사와 대화하는 것이 치과환자가 마취를 하지 않고 이를 뽑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 핵무기 철수 거론


대통령 취임 며칠 뒤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와 루이스 메네트리 미 8군사령관이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통역을 하고 다른 사람을 배석시키지 말아 달라”면서 “대한민국에 전술핵이 있다”고 알려줬다. 핵무기의 철수를 맨 처음 거론한 것은 나였다. 1991년 7월 2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정식으로 (핵무기 철수를) 제기했다. 당시 언론은 핵무기가 여러 군데 배치돼 있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한 군데뿐이었다.

○ 퇴임

YS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부터 취임 때까지 석 달간 청와대에서 (YS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쓰면서 여러 번 자문한 것은 ‘나는 왜 YS의 인간됨과 역사관을 오판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산모 역할을 한 나를 (어떻게) 역사의 표면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가”라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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