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레이스’ 보낸 샤론 최 ”내게 남은 통역은 내 자신과 영화뿐”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9일 16시 20분


코멘트
샤론 최(왼쪽)가 더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대답하고 있다. (더 할리우드 리포터 유튜브 갈무리) © 뉴스1
샤론 최(왼쪽)가 더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대답하고 있다. (더 할리우드 리포터 유튜브 갈무리) © 뉴스1
“2019년 4월, 전화 인터뷰 중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영화 제목을 놓쳤을 때, 다른 사람이 이 자리를 차지하겠구나 싶었다.…그 후 나는 프랑스 칸에서 한국 영화가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

봉 감독의 통역사 최성재 씨(샤론 최)의 기고문을 19일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가 독점 공개했다. 수많은 언론 인터뷰를 고사해한 최 씨가 10개월간의 ‘오스카 레이스’를 보낸 소감을 담담한 글로 공개해 눈길을 끈다.

그는 “(미국에서) 6개월은 새로운 도시와 좋은 소식, 목소리를 지키기 위한 허니레몬티로 가득 찬 시간 이었다”며 “순식간에 할리우드의 심장에 빨려 들어간 믿을 수 없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끝나면 다가올 우울함을 달래려 1월은 바닷가에서 보내기로 작정했다”고 털어놨다.

칸 영화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고국의 영화에 감동 받는 모습이 뭉클했다”고 했다.

“어릴 때 미국에서 보낸 2년은 나를 이상한 ‘혼종’으로 만들었다. 미국인이 되기엔 너무나 한국적이며, 한국인이기엔 너무나 미국적인, 그렇다고 한국계 미국인도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책과 영화로 꾸준히 영어를 익혔지만, 정작 대학을 다니려고 로스앤젤레스(LA)에 갔을 때 ‘잘 지내?’라는 인사에도 답하기 어려웠다. 언어 때문에 사람들에게 내 생각의 절반만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두 곳 이상의 문화를 담기는 무척 어렵다. 그런데 ‘기생충’은 순식간에 장벽을 허물었다. 나는 이틀만 통역을 맡기로 했지만, 결국 폐막식 날 무대 뒤에서 ‘기생충’의 수상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오스카 레이스’에도 함께 하게 된 그는 “나의 나머지 1년은 모두 유튜브에 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로 이전의 기억을 지우기 바쁜 시간이었다. 불면증과 문화 차이를 극복하려고 평생 본 영화들에 기댔고, 봉 감독의 명확한 표현에 의존했다.”고 적었다.

“봉 감독의 배려와 대학에서 그에 관해 논문을 쓴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럼에도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자신의 성공이 운으로 얻어졌다고 생각해 불안해하는 심리)과 내가 존경하는 사람의 말을 잘못 옮길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무대 뒤에서의 10초 명상과 ‘사람들이 보는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생각만이 유일한 치료제였다.”

그는 ‘오스카 레이스’가 영광스러운 시간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유머 넘치는 봉 감독와 배우 송강호의 이야기에 터지는 웃음, ‘기생충’ 출연진이 배우조합상을 수상하고 나온 기립 박수, 그리고 봉 감독이 마틴 스코세지에게 경의를 표하는 반짝이는 순간을 직접 경험한 것은 특권이다.”

그리고 평소 흠모했던 영화인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뻐하는 모습에 봉 감독이 ‘성덕’(starstruck)이라고 놀렸다고도 했다. 그는 “다가올 시간에는 그들과 함께 다시 일하게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아마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홀리혹 하우스’에서 진행한 봉 감독의 뉴욕 매거진 인터뷰를 그는 기억의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아름다운 라이트의 건축 안에서 봉 감독이 직관적으로 공간을 읽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스터클래스를 듣는 듯했다. 자신의 비전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봉 감독의 능숙함은 그가 조여정의 화보를 연출했을 때 더 빛났다. 유머와 재치가 곁들어진 빠른 판단력은 많은 영감을 줬다.”

그러면서 “두 가지 언어를 오가는 것은 나의 직업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 방식”이었다고 털어놨다.

“나는 20년 동안 나를 통역해야만 했다. 한 심리학자가 언젠가 내게 말하길, 1개 국어를 하는 사람이 1만 단어를 안다면, 2개 국어 구사자는 각 언어의 5000단어만을 안다고 했다. 나는 평생 두 언어 사이에서 애를 먹었다. 그래서 영화의 시각 언어에 빠져들게 됐다. 영화는 나의 내면이 외부와 소통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통역과 비슷하지만, 억지로 단어에 끼워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는 또 “통역은 뇌의 언어적 능력이 아닌 유연한 사고 능력을 요구한다”며 “공교롭게도 유연함이 ‘기생충’을 이 자리에까지 오게 해줬다”고 덧붙였다.

“유연함은 이해와 공감을 넓혀준다. 공감은 ‘타자’와 나를 연결해주는 다리다. 그리고 나는 덜 외롭기 위해 이야기꾼이 되기로 했다. 이 글은 오스카 레이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에 대한 것이다. 봉 감독이 인용한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처럼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기에, 나는 지금 한국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 받는 관심이 순간에 불과할 것임을 안다고 털어놨다.

“내 얼굴이 소셜미디어 피드에 뜨는 경험은 참 이상했다. 트위터에 내 이름이 비아그라 광고에 해시태그로 언급되는 걸 보고, 지금의 유명세가 반짝 인기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화장품 광고 제안이 왔다고도 들었다. 나는 영화에 대한 관심을 퍼뜨려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다. 한국 정부가 2월 9일을 ‘기생충 국경일’로 정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다음번엔 내 이름이 나의 이야기(작품)를 통해 언급되었으면 좋겠다.”

그는 화려한 시간에서 벗어나 작품에 몰두할 것이라며 글을 마쳤다.

“당분간 나는 노트북과 씨름하며 보낼 것 같다. 내게 남은 유일한 통역은 내 자신과 영화뿐이다.”

김민기자 kimm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