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예배당 종소리 울리자… 태극기 내걸리고 장터 곳곳 만세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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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0화>전남 강진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나는 毒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막음 날 내 외로운 魂 건지기 위하여’(김영랑의 시 ‘독을 차고’)

‘순수 서정시인’으로 알려진 영랑 김윤식(1903∼1950)이 1939년 11월 잡지 ‘文章’에 발표한 작품이다. 영랑이 주로 활동하던 1930∼1940년대는 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의 야욕이 정점을 달리던 시기다. 영랑은 당시 상황을 ‘이리’(일제)와 ‘승냥이’(친일파)가 판을 치는 짐승 같은 세상이라고 보고, 독(毒)을 차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의 저항정신은 시어에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김영랑은 고향인 전남 강진에서 3·1운동에 가담했다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을 정도다. 당시 강진은 영랑뿐만 아니라 26인의 의사(義士)들이 청년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친 항일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강진의 만세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차는 안타깝게도 성사되지 못했지만 2차 시위는 치밀한 준비를 거쳐 ‘전남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기다


1976년 5월 9일 동아일보와 3·1운동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전남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한 3·1운동 기념비준공식 모습. 이날 준공식에는3000여 명이 참석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강진군 제공
1976년 5월 9일 동아일보와 3·1운동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전남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한 3·1운동 기념비준공식 모습. 이날 준공식에는3000여 명이 참석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강진군 제공
1919년 이전에도 강진에선 만세운동의 열기가 꿈틀대고 있었다. 향리(鄕吏)가의 자제들이 보통학교나 외지 유학을 통해 신지식에 일찌감치 눈을 뜬 데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활발해 독립운동의 뜻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불이 붙은 시점은 3월 20일 일본 메이지(明治)대 유학생이자 조선청년독립단의 핵심 멤버였던 김안식이 귀향하면서부터다. 김안식은 강진읍에 사는 김영수, 김학수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규합하는 등 시위 준비에 나섰다.

이때 서울 휘문의숙에 다니던 김윤식과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경천이 고향을 찾아 내려왔다. 김윤식은 3·1운동으로 학교가 휴학하자 독립선언서와 애국가 가사를 구두 안창에 숨겨서 가져왔다. 양경천은 내의의 섶을 따고 그 속에 독립신문을 넣어 왔다. 김안식과 김윤식은 8촌 형제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몇 차례 모임을 갖고 거사 계획을 세웠다. 만세운동을 두 차례로 나눠 1차는 3월 하순, 2차는 4월 초순에 각각 진행하기로 했다. 시위를 주도할 1진은 김안식이, 뒤를 이을 2진은 평양신학교 졸업생 이기성이 각각 책임자가 됐다.

1진은 3월 25일 장날을 기해 거사를 벌이기로 했다. 날짜가 정해지고 태극기와 선언서를 만드는 작업은 서성리 김현균의 집 뒤 대밭 속 작은 초가에서 이뤄졌다. 보안을 위해 밤을 틈타 작업하고, 만든 태극기와 선언문을 대밭에 파묻는 등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작업이 계속되고 참여자가 늘어나자 거사 계획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만다. 3월 20일 주동자 12명이 체포되고 제작됐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모두 압수당하면서 1차 시위는 수포로 돌아갔다.

체포된 이들은 광주지법 장흥지청에서 1년에서 1년 2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지만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모두 풀려났다. 당시 검찰은 이에 반발해 상고했지만 고등법원도 기각 판결을 내려 무죄가 확정됐다. 당시 검찰은 이들에 대해 보안법 7조(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론 동작 또는 타인을 선동 교사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은 이들이 미수에 그쳐 해당 법률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 태극기 펄럭이자 천둥 치듯 울려 퍼진 만세 소리

1차 거사가 무산됐지만 만세운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2차 시위 준비는 약속대로 이기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구속돼 재판을 받은 이들이 2차 시위 계획을 철저히 함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기성은 3월 22일 같은 마을 청년인 김현봉 황호경과 모임을 갖고 1차 시위의 실패 원인을 분석한 뒤 새로운 작업 방침을 정했다.

우선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작업 장소를 여러 곳으로 분산했다. 각 작업장은 독립적으로 운영하되 상호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여성들에게 외부의 경계와 일경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겼다. 또 교회 신도를 중심으로 시위 준비 동참자들을 모았다. 2차 거사일을 장날인 4월 4일로 정한 이들은 예배당의 정오(正午) 종소리가 울리고 군청 뒤 북산에 태극기가 내걸리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북산에 태극기를 누가 게양하느냐가 문제였다. 이때 농사를 짓는 김후식(당시 24세)이 “내가 걸겠다”고 나섰다.

준비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강진보통학교 학생 가운데 나이가 많고 통솔력이 있는 이은표가 학생 동원을 담당하기로 했다. 김현봉 황호경 김후식 오승남 등은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 300여 장, 선언서 70여 통, 독립가 20여 통을 준비해 4월 3일 밤 이기성 집으로 운반했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이들은 이기성의 집에 모여 마지막 점검을 한 뒤 각자 만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독립가 등을 시장 상품이나 어물 상자에 넣어 강진읍 장터로 이동했다. 정오가 되자 만세 시위 시작을 알리는 예배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에 김후식은 집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품에 안고 강진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산에 올랐다. 그는 일명 ‘비둘기 바위’ 정상에 태극기가 걸린 장대를 소나무에 묶었다.

북산에 태극기가 펄럭이자 장터에는 천둥 치듯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진보통학교 학생들도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남문거리에서 시위 군중과 합류했다. 군중들은 남문 앞 광장에 집결해 가두행진에 나섰다. 이기성 황경호 오승남 등이 선두에 나서자 1000여 명이 뒤를 따랐다.

시위 군중이 불어나자 강진경찰서는 해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장흥에 있는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해가 저물 무렵 시위대가 경찰서로 진입하자 지원 나온 병력들이 강제 해산에 나섰다. 창검이 번득이고 총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대열은 흩어졌고 주동자 22명이 경찰에 끌려갔다.

이들 가운데 8명은 풀려나고 14명이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에 참여한 박영옥(당시 21세·여)은 재판정에서 심문하는 일본 검사에게 “부모 잃은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이 당연하듯 조국을 잃은 내가 나라를 찾겠다는 것이 무슨 죄냐”며 따졌다. 2차 시위를 주도한 이기성 김현봉 황호경 오승남 등은 서울고등법원에까지 상고하며 독립운동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기각당하고 최고 2년형이 확정돼 옥살이를 했다.

○ “강진 만세운동은 저항이자 축제였다”

전남 강진군은 매년 4월 4일 3·1운동기념비와 읍내 장터에서 ‘강진 4·4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열고 있다. 강진군 제공
전남 강진군은 매년 4월 4일 3·1운동기념비와 읍내 장터에서 ‘강진 4·4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열고 있다. 강진군 제공
강진 만세운동의 특징은 청년, 학생들이 시위를 1, 2차로 나누어 계획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는 점이다. 1차 시위의 실패로 2차 시위 준비는 더욱 용의주도하게 진행됐다. 태극기와 선언서를 분담해 만들고, 작업 시 경계를 위해 감시자를 두는 등 철저한 조직 관리를 통해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강진의 만세 운동에 참여한 민중에게 시위는 저항인 동시에 축제였다”며 “이는 의병과 동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며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기원이 됐다”고 평가했다.

강진에는 3·1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두 곳에 있다. 하나는 1976년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된 3·1운동 기념비다. 동아일보와 강진 유지들로 구성된 건립위원회가 세운 기념비로 뒷면에 당시 독립만세를 외쳤던 2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진읍 남포마을 입구의 기념비는 4·4만세 시위에 가담한 마을 출신 강주형 박학조 박영옥 차명진 정헌기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황호용 강진군 문화원장(76)은 “오로지 태극기만을 손에 쥐고 항거한 강진의 만세운동은 인근 목포와 나주, 곡성 등지의 만세 시위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4일 만세 재현 행사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 만세운동 계획 김안식, 이듬해 동아일보 강진분국장으로 ▼

2차 시위 주도 김현봉은 분국 기자로
1927년 강진지국 승격 뒤엔 日결합 지주 맞선 소작쟁의 집중 보도


강진 만세운동의 주역인 김안식과 김현봉을 각각 동아일보 강진분국장과 분국 기자로 발령했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0년 7월 14일자 사고. 동아일보DB
강진 만세운동의 주역인 김안식과 김현봉을 각각 동아일보 강진분국장과 분국 기자로 발령했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0년 7월 14일자 사고. 동아일보DB
2011년 강진군이 펴낸 ‘강진군지’에 따르면 강진 만세운동의 1차 시위를 계획한 김안식과 2차 시위를 주도한 김현봉은 1920년 동아일보 강진분국장과 분국 기자였다. 김안식은 1919년 6월 무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 3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김현봉은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형을 살았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당시 강진분국은 목포지국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당시 목포지국은 김현봉의 형이자 김안식과 함께 강진의 1차 시위를 준비했던 김현상이 운영하고 있었다.

김안식은 이런 인연으로 1921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맡았다. 1933년 전남도평의원(지금의 도의원), 금릉중학교 2대 교장을 거쳐 1935년 강진지국 고문으로 위촉됐다.

김현봉은 1922년 동아일보 강진분국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3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김현봉을 분국장으로 임명했으며 분국을 서성리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강진분국은 1927년 강진지국으로 승격되면서 2차 만세 시위에 참여한 차부진을 기자로 임명했다. 지국장을 포함해 기자를 4명으로 늘린 강진지국은 이후 청년회와 신간회 활동, 일제와 결합된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료 횡포에 맞서는 소작쟁의운동 등을 집중 보도했다. 1931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강진군 군동면 소작쟁의단 200명이 출장소에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다가 주임을 구타하자 경찰이 주모자 6명을 체포했다. 소작인들은 분노하여 약 500명이 경찰에 몰려가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다가 다시 50, 60명이 검속되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1933년 9월 강진에서는 동아일보 병영지국장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경관주재소(일본 경찰의 말단 조직)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병영지국장이던 방태섭은 병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강진의 사회운동을 동아일보에 적극 보도하던 기자였다.

강진 향토사를 연구하는 윤순학 씨(62·전 강진군 기획홍보실장)는 “강진의 애국지사들 중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줄기차게 일제 침략에 저항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자립자강운동에 나섰던 선각자가 적잖다”고 말했다.

강진=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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