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죽음, 우주의 소멸[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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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베르토 파솔리니의 ‘스틸 라이프’

이정향 감독
이정향 감독
우연이었다. 3년 전 시나리오 심사를 맡아 지방에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며칠간 숙소에 갇혀 시나리오만 읽어야 할 처지가 아니었다면, 졸음을 떨치려고 TV를 틀어 무료 영화 목차에 있던 이 낯선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베니스 영화제 수상작이란 소개에 끌려 클릭했지만 밋밋하게 흘러가는 화면을 보며 하품을 했다. 분명 ‘내 영화가 더 낫겠다’ 싶은 오만함도 품었다.

영국 런던의 구청 직원인 존 메이는 44세 독신남이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길로 출근하고, 점심으로 사과 한 알을 먹고, 어제와 똑같은 조촐한 저녁을 차려 먹은 후 자신이 장례를 치러준 무연고자들의 유품 사진을 고이 정리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무연고사한 이들의 형식적인 장례식이다. 대충해도 뭐라 할 이가 없는 일이건만 존은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공간을 꼼꼼히 뒤져서 찾아낸 빛바랜 사진이나 수년 전 주고받은 편지 한 통으로 그들의 과거를 추적하고 연락이 닿은 지인에게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하지만 참석한 이는 언제나 존뿐이다.

친구도 애인도 없이 묵묵히 일만 하던 존은 무연고자들의 장례를 위해 예산을 쓰는 건 낭비라고 여기는 상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마지막 무연고자를 위해 사재까지 써가며 성심성의껏 장례식을 준비하던 존은 제목 ‘스틸 라이프’처럼 정물화 같았던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온다. 맛있는 것을 먹고 밝은색 옷을 입고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보기도 한다. 또한 한 여인에게 설레며 밝은 미래를 꿈꾼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내가 본 영화들 중 최고의 반전이 마지막 6분간 펼쳐진다. ‘심쿵’이란 단어가 있음에 감사했고, 제목이 여러 뜻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 사람이 죽는다는 건 우주가 하나 사라지는 것이란 걸 증명하듯 초라한 유품과 몇 장의 사진만을 보고서도 그 사람의 일생이 값졌음을 부인할 수 없는 추도문을 쓰는 존. 세상이 오래전에 잊은 존재들을 온 마음으로 보듬어 진주를 찾아내는 존을 보노라면, 자세히 보면 다 예쁘다는 어느 시 구절이 떠오른다.

무릎을 꿇고 TV 앞에 공손히 앉았다. ‘졌다’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나 자신이 많이 모자란다는 생각, 더 고운 마음씨로 겸손하게 세상을 대해야겠다는 반성이 일었다.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이 직접 각본도 썼다. 음악을 맡은 이는 그의 아내다. 스틸 라이프는 최소한의 재료로 만든 김밥 같다. 그런데 정말 맛났다. 내용물이 적을수록 쉬 상하지도 않는다.

◇이정향 감독=1964년생.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 ‘오늘’ 등의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지독한 야행성으로 오후 3시가 돼야 제정신이 든다.
 

이정향 감독

#우베르토 파솔리니#스틸 라이프#이정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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