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다 아는 척하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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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말콤 글래드웰 지음·유강은 옮김/472쪽·1만8500원·김영사

게티이미지코리아
게티이미지코리아
영화 ‘패터노’에서 주연을 맡은 알 파치노(왼쪽)와 샌더스키 역의 짐 존슨.
IMDb 제공
영화 ‘패터노’에서 주연을 맡은 알 파치노(왼쪽)와 샌더스키 역의 짐 존슨. IMDb 제공
#1. “제리 샌더스키가 샤워장에서 벗고 있었다는 걸 감독한테 설명했습니까.”(검사)

“네, 물론이죠.”(매퀴어리)

“남자아이하고 신체를 접촉하고 있었다는 것도 설명했지요?”(검사)

2017년 3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한 법정에서 진행된 아동 성폭력에 대한 증언이다. 매퀴어리는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미식축구팀 젊은 코치, 샌더스키는 같은 팀의 고참 코치였다.

‘샌더스키 스캔들’은 50여 건의 아동·청소년 피해가 드러나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이 더욱 관심을 모은 것은 감독이 61년간 팀을 이끌며 전무후무한 400승 기록을 남긴 ‘영웅’ 조 패터노였기 때문이다. 2018년 미국에서 공개된 배우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패터노’가 이 사건을 다뤘다.

#2. 2015년 7월 백인 경찰관 브라이언 엔시니아는 텍사스주 휴스턴 인근에서 흑인 여성 샌드라 블랜드의 차를 세운다. 블랜드가 차로 변경 시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는 이유다. 짧은 대화 뒤 블랜드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차에서 내리라는 엔시니아와 강경하게 버틴 블랜드의 말싸움은 점차 거칠어진다. 결국 엔시니아는 블랜드를 체포하는데 유치장에 갇힌 블랜드는 사흘 뒤 자살한다. 이 사건은 2018년 다큐멘터리 ‘그녀의 이름을 말하라: 샌드라 블랜드의 삶과 죽음’으로 제작됐다.

‘타인의 해석’의 원제는 ‘Talking to Strangers’. 우리말로 하면 ‘낯선 이와 말하기’다. 저널리스트로서 사회과학의 최신 연구결과를 토대로 사회와 인간관계에 숨은 원리를 분석해온 말콤 글래드웰이 6년 만에 낸 신작이다. 그는 이전 저작 ‘아웃라이어’에서 ‘1만 시간의 법칙’, ‘다윗과 골리앗’에서 역경과 결점의 힘, ‘블링크’에서는 처음 2초 직관의 중요성을 메시지로 던지며 국내에도 적지 않은 팬들을 보유한 작가다.

그가 신작에서 주목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특히 낯선 이들을 접할 때 저지르는 오류다. 샌더스키가 체포된 것은 2001년 그의 성폭력이 패터노 감독에게 보고된 뒤 10년이 지나서였다.

글래드웰은 묻는다. 여러 사람이 보고를 받았음에도 젊은 코치의 말은 왜 무시됐을까, 일부 사람들은 증거가 명백함에도 왜 아직도 ‘가장 더러운 남자’의 무죄를 주장할까? “다음에는 깜빡이 켜고 차로 바꾸세요” “예,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몇 마디로 끝났을 수 있었던 엔시니아의 말 걸기는 왜 비극으로 끝났을까?

저자는 타인이 정직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진실기본값 이론’, 태도와 내면이 일치한다고 착각하는 ‘투명성 관념 맹신’, 행동과 결합하는 맥락의 중요성을 간과한 ‘결합성 무시’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책에 나오는 기둥 개념들은 낯설지만 저자는 다양한 사례, 심리학 이론과 실험, 심지어 미드 ‘프렌즈’ 배우들의 표정 분석까지 등장시켜 독자들을 설득한다. 패터노와 대학 총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충격적인 보고를 받으면서도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샌더스키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못한다. 그 기저에는 서로를 믿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도 깔려 있다. 경찰관 엔시니아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흑인 여성의 말투와 담뱃불 등에서 태도와 내면을 일치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이다.

법정은 당시 60대의 샌더스키에게 “그의 여생에 확실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량을 선고한다”며 징역 30년에서 최대 60년, 사실상의 종신형을 선고했다. 패터노 동상은 끌어 내려졌고, 보고 라인의 정점에 있던 총장도 해임됐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타인의 해석#말콤 글래드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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