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 암호 해독, 2차대전 終戰 앞당겨 1400만 명 목숨구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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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본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삶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삶을 그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암호 ‘에니그마’를 풀어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진 왼쪽의 기계가 튜링이 만든 암호 해독기 ’봄’이다. 영화사 하늘 제공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삶을 그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암호 ‘에니그마’를 풀어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진 왼쪽의 기계가 튜링이 만든 암호 해독기 ’봄’이다. 영화사 하늘 제공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군과 대치하던 연합군에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독일군의 무선 통신을 도청하기는 쉬웠지만 ‘에니그마(Enigma)’라는 기계로 암호화돼 있어 내용까지 알아내긴 어려웠다. 17일 개봉하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은 암호 해독기를 개발해 종전(終戰)을 2년 앞당기며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평가받는 영국의 천재수학자 앨런 튜링의 일대기를 다룬다.

○ 독일군 ‘에니그마’ 암호 뚫어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는 ‘다표식 대치암호’라는 고전암호로, 알파벳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다른 알파벳으로 바꿔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가령 ‘뒤로 3번째’가 규칙이라면 ‘ABC’는 ‘DEF’로 표기되는 식이다. 에니그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알파벳을 입력할 때마다 규칙이 바뀌도록 했다. 그 결과 에니그마는 1해(垓)5900경(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가짓수의 암호를 만들어냈다.

1938년 에니그마의 암호 해독에 투입된 튜링은 “기계가 만드는 암호는 기계가 해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2년에 걸쳐 암호 해독기 ‘봄(Bombe)’을 개발했다. 하지만 봄으로도 모든 경우의 수를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에니그마 해독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튜링은 독일군이 기밀문서의 첫 문장을 ‘히틀러 만세(Heil Hitler)’나 ‘일급비밀(Streng Geheim)’로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경우의 수를 좁히는 기지를 발휘해 결국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지동표 울산과학기술대(UNIST) 석좌교수는 “에니그마에 사용된 고전암호는 여러 사람이 사용하기 어렵고 컴퓨터가 개발된 뒤부터는 너무 손쉽게 해독이 돼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며 “최근에는 신용카드나 인터넷 뱅킹 등에 사용되는 공개키 암호처럼 컴퓨터로도 쉽게 뚫을 수 없는 암호 체계가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 슈퍼컴퓨터 원조는 튜링기계

영화에서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사람과는 다른 논리 구조로 생각한다”고 답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 싶었던 튜링은 1936년 ‘튜링 기계’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튜링 기계는 이후 현대 컴퓨터의 모델로 불리며 튜링은 ‘컴퓨터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다.

영화 제목인 ‘이미테이션 게임’은 컴퓨터가 사람의 사고방식을 모방한다는 의미로 튜링이 고안한 ‘튜링 테스트’를 가리킨다. 튜링 테스트는 익명의 상대와 대화를 나눈 뒤 상대가 컴퓨터인지 인간인지 구분하는 인공지능 판정 시험이다.

이지수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책임연구원은 “현대 컴퓨터는 튜링 기계를 발전시킨 것”이라며 “슈퍼컴퓨터나 양자컴퓨터도 기본적으로는 튜링 기계의 개념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천재 수학자였던 튜링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당시 영국 정부가 법으로 금지한 동성애 혐의로 1952년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그에게 10년간의 감옥 생활과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는 화학적 거세 중 양자택일을 명령했고, 튜링은 연구를 위해 거세를 택했다. 하지만 여성호르몬의 영향으로 신체에 변화가 생겼고 이에 좌절한 튜링은 1954년 시안화칼륨(청산가리)을 넣은 사과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2013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튜링을 공식 사면했다.

이 연구원은 “최근에는 튜링 기계를 뛰어넘어 사람의 뇌를 닮은 신경모방컴퓨터도 등장했다”면서 “튜링이 꿈꾼 ‘사람처럼 사고하는 컴퓨터’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해답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우상 동아사이언스 기자 ido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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