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꼴찌 - 왕따보다 ‘닌따(닌텐도 왕따)’가 더 무서워요”

  • 입력 2009년 4월 18일 02시 58분


태어나면서부터 전자기기에 익숙해진 ‘디지털 네이티브’ 초등생들

《요즘 초등학생 사이에서 디지털 기기를 중심으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일본 휴대용 게임기인 닌텐도DS가 대표적이다. 닌텐도를 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받는다는 ‘닌텐도 왕따(닌따)’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생겨났을 정도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와 가까운 ‘디지털 네이티브(native·원주민)’인 초등학생에게 게임은 주류의 문화다. 성적 꼴찌보다 닌텐도 왕따가 더 두렵다고 한다. 부모 세대는 왕따가 두려워 게임기를 사주지만 ‘내 아이만 공부 대신 게임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에 떨고 있다. 본보는 닌따 현상의 현주소와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지역 초등학생 3명의 일과를 밀착 취재했다.》

휴대용 게임기 열풍… 10명중 8명꼴 보유

“없으면 대화 못끼어”…또래들 소통 수단으로

“현준아, 운전사 아저씨에게 인사해야지!”

9일 오후 1시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노란색 학원 셔틀버스에 오른 초등학교 2학년생 조현준 군(8)은 말이 없었다. 인사하라는 엄마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휴대용 비디오게임기 ‘닌텐도DS Lite’를 꺼내들었다.

‘뿅뿅….’ 게임기에서 전자음이 흘러나오자 현준이의 옆자리에 단짝 친구 김은규 군(9)이 앉았다. 은규는 ‘닌텐도 4총사’ 중 한 명. 닌텐도 4총사는 닌텐도DS를 하며 친해진 친구들의 모임으로 게임을 가장 잘하는 현준이가 중심인물이다.

최근 현준이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새 학기가 되어 짝을 정하는 날, “현준이와 짝 하고 싶은 친구”라는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8명이 손을 들었다. 현준이가 닌텐도 게임을 잘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2년 전만 해도 현준이는 이른바 ‘왕따’였다. 왜소한 체격, 내성적인 성격 탓에 유치원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했던 것. 그런 현준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스타’로 등장한 것은 지난해 닌텐도DS를 손에 넣은 뒤부터였다. 닌텐도 게임을 잘하면 인기가 많다는 얘기를 들은 현준이는 필사적으로 ‘포켓몬스터’ 게임에 매달렸다. “현준이 닌텐도 잘한대” “현준이 끝판 깬대” 같은 소문이 돌자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5, 6학년 형들도 게임 노하우를 알기 위해 현준이의 환심을 사려 했고 집에 놀러오겠다는 친구도 생겼다.

왕따에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현준이의 말. “인기가 많아져서 좋아요. 내가 게임을 하면 친구들이 전부 옆에 몰려들어요. 반대로 ‘닌따’는 아무도 안 쳐다봐요.”

○ 취미 도구에서 사교활동 필수품으로

닌텐도DS는 부모들의 생활에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닌텐도 4총사’의 부모들은 닌텐도DS에 빠진 아이들을 걱정하다 친해졌다. 자녀 생일파티에는 부모들이 함께 참여하며 최근에는 가족 동반으로 ‘펜션 여행’까지 다녀왔다. 현준이가 4총사의 중심이라면 부모 모임의 리더는 현준이 어머니 신명 씨(40)다.

단순히 휴대용 게임기였던 닌텐도DS는 초등학생들의 ‘사교활동’을 위한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3명 이상이 모인 자리에는 으레 포켓몬스터, 슈퍼마리오 같은 닌텐도DS 게임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는 “게임을 잘하면 스타 대접을 받고 반대로 게임기가 없으면 따돌림을 당하다 보니 미묘한 ‘권력구조’가 생겨난다”며 “이는 주류 문화를 좇지 않으면 비주류가 되는 한국의 어른 사회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본보가 수도권에 사는 초등학생 143명을 조사한 결과 닌텐도DS를 갖고 있는 학생은 109명으로 전체의 76.2%를 차지했다. 서울 용산구 소재 초등학교 4학년 한 학급의 경우 반 학생 36명 중 32명이 갖고 있었다. 똑같은 기기를 3대나 산 학생도 있었다. ‘닌따’가 되지 않기 위해 집에 놀러온 친구들과 함께하려는 이른바 ‘접대용 닌텐도’였다.

온라인 쇼핑몰 ‘인터파크’는 최근 8∼13세 회원들의 디지털 기기 구매 현황을 발표했다. 그중 판매 1위는 닌텐도DS로 전체의 37%를 차지했다.

○ 없으면 짝퉁이라도… ‘짝텐도’도 등장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4학년 최상우 군(가명·9)은 닌텐도DS가 없다. 부모님이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우네 반 아이들 중 20명은 닌텐도DS를 갖고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상우는 최근 엄마에게 ‘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노트북을 사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디지털 기기 중 뭐라도 갖고 있어야 덜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학부모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 초등학교 4학년 자녀를 둔 주부 윤형경 씨(39)는 최근 아이에게 ‘반협박’(?)을 당했다. “엄마, 우리 반이 28 대 1로 나뉘었어. 나만 닌텐도DS가 없어서 왕따야.”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윤 씨는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게임기를 사줬다.

‘닌텐도DS를 가져오지 말라’는 가정통신문을 보내는 학교도 생겨났다. 그랬더니 학생들 사이에서 등장한 게 ‘공책 닌텐도’였다. 공책을 세로로 세워 닌텐도 ‘듀얼 스크린’처럼 맞춘 후 거기에 포켓몬스터 캐릭터를 그려 넣고 친구와 ‘가상 대전’을 벌이는 방식이다. 일명 ‘짝텐도(짝퉁 닌텐도)’라고 불리는 중국산 가짜 닌텐도도 출연했다. 닌텐도DS 모양을 본뜬 이 제품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6000∼8000원에 팔리고 있다.

닌텐도뿐만 아니다.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휴대전화, MP3플레이어, 노트북 등을 하루 종일 끼고 산다. 한국정보사회진흥원 정현민 책임연구원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디지털 기기를 ‘자아’와 동일시한다”면서 “게임을 잘하는 것이 실력이고 게임 소프트웨어 개수가 ‘부(富)’가 되는 또래집단에서 어린이들은 영웅이 되려는 심리를 닌텐도DS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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