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집 아들’ 김광현, 넌 웃을 때가 멋있어[광화문에서/이헌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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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올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김광현(32·세인트루이스)을 보고 있자면 예전 생각이 떠오른다.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2007년 김광현의 앳된 모습이다. 당시 그는 고교를 갓 졸업한 SK의 신인 투수였다.

지금 그는 메이저리그의 ‘늦깎이 신인’이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왼손 에이스로 성장한 뒤 지난해 말 세인트루이스와 2년 800만 달러(약 97억 원)에 계약했다. 긴 세월 사이 그의 위상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웃는 모습이다. 어딘가 소년의 느낌이 물씬 나는, 천진난만한 웃음이다. 훈련을 할 때도, 동료들과 얘기할 때도, 취재진과 인터뷰를 할 때도 그는 바로 이 웃음을 짓는다. 어쩌면 이 웃음이 그를 모든 야구 선수들의 꿈인 메이저리그로 이끈 게 아닐까. 겸손과 타인에 대한 고마움이 자연스럽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김광현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야구를 무척 잘하면서도 야구 잘하는 선수 특유의 거들먹거림이 없었다. 그를 프로 1차 지명으로 뽑았던 허정욱 SK 스카우트는 이렇게 말한다. “광현이를 보러 수시로 안산공고 숙소를 방문했다. 그런데 어느 날 숙소에 갔더니 3학년이던 광현이가 혼자 방 청소를 하고 있더라. 실력도 뛰어나지만 인성도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했다.”

김광현의 이런 자세는 부모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경기 안산에서 떡집을 운영하며 김광현을 키운 아버지 김인갑 씨와 어머니 전재향 씨는 겸손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는 아들을 뒀지만 이를 밖으로 내세운 적이 없다. 김광현이 등판하는 날엔 조용히 야구장을 방문했다. 티켓은 직접 구매했다. 김광현이 뜻깊은 승리를 거두거나, 팀에 좋은 일이 있을 땐 손수 만든 떡을 가지고 왔다. SK의 한 직원은 “광현이 부모님은 어쩌다 우리와 마주치면 ‘항상 고맙다’고 먼저 인사를 건네셨다”고 했다.

김광현도 베푸는 게 익숙하다. 후배나 동료들과 어디를 가면 그는 항상 먼저 지갑을 꺼낸다. 몇 해 전 스프링캠프 때는 불펜 보조 요원들과 후배 투수들을 고깃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김광현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이처럼 그가 뿌려놓은 씨앗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2016년 말 그는 SK와 4년 85억 원에 계약했다. 올해까지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기에 메이저리그에 가려면 구단의 허락이 필요했다.

힘을 실어준 것은 팬들과 동료들이었다. 그간 여러 차례나 팀을 우승으로 이끈 기여도와 그의 인성을 잘 아는 사람들이 그의 미국행을 응원했다. 최창원 SK 구단주 역시 대승적인 차원에서 김광현의 미국행을 지원했다. 미국에 가기 전 따로 식사를 하며 그의 꿈을 응원하기도 했다.

세인트루이스의 스프링캠프지인 미국 플로리다주 주피터와 SK의 캠프지인 베로비치는 차로 1시간 거리다. 최정과 한동민 등 SK 선수들은 쉬는 날 김광현을 만나러 왔다. 외국인 선수 제이미 로맥 역시 김광현을 찾아 그를 응원했다. 떠나면 남남이라지만 김광현과 SK는 여전히 끈끈하다. SK에서는 이런 말이 오간다고 한다. “딴 사람은 몰라도 김광현은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김광현#sk#메이저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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