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의상[간호섭의 패션 談談]〈33〉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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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영화만큼 대중에게 사랑받는 예술장르는 드문 것 같습니다. 극장이 유일한 관람 공간이었던 어린 시절, 이모나 고모들을 졸라 ‘메리 포핀스’를 열한 번이나 봤습니다. 구름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하늘에서 우산을 타고 내려오는 마법만큼이나 줄리 앤드루스의 로맨틱한 의상들은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의상이 중요한 영화들은 주로 시대극이나 서사극이 많습니다. 보는 내내 과거로 회귀해 극에 몰입하고 정서적 공감을 얻죠.

꼭 많은 제작비와 유명 디자이너가 투입돼야만 좋은 영화 의상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등장인물의 정서적 반영과 계층 간 표현들이 의상을 통해 사실감을 이끌어 냅니다.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몰락한 남부 명문가의 딸로 출연한 블랑시(비비언 리)는 재산을 탕진한 뒤 여동생과 매부 스탠리(말런 브랜도)가 살고 있는 초라한 아파트로 이사 옵니다. 옛것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블랑시는 주름 장식이 과장된 낡은 드레스에 인형 가발을 쓴 듯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화려했던 모습을 재현하려 하지만 지금 처지로는 이게 최선인 거죠. 반면 스탠리의 면 티셔츠와 청바지는 당시 노동계층의 일상복을 리얼하게 표현했습니다. 후에 우디 앨런 감독이 영화 ‘블루 재스민’을 21세기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만들었습니다. 주인공 재스민(케이트 블란쳇)도 여동생의 서민 아파트에 얹혀살게 됐을 때 포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에르메스 버킨백이었죠. 마지막 남은 신분증인 셈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의상들은 현 시대의 통찰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 냅니다. ‘리스펙트(존경)’할 만한 박 사장(이선균)의 의상에는 넥타이가 없습니다. 촉망받는 벤처기업인은 세트 정장도 안 입습니다. 그 대신 수행기사는 넥타이에 정장을 입어야 합니다. 의상을 선택할 자유가 없기 때문이죠. 또 심플하고 착한 사모님(조여정)은 꽃무늬 의상을 입지 않습니다. 액세서리도 큼지막한 ‘알반지’는 안 낍니다. 요즘 젊은 사모님들은 심플한 의상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가격은 착하지 않죠. 영화에 잠깐 나왔지만 재스민이 유일하게 남긴 버킨백도 색상별로 여러 개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의상에 맞춰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죠. 아들 기우(최우식)가 과외면접을 보러갈 때 신은 흰색 운동화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깨끗한 운동화는 간만에 마련한 소중한 물건일 수도 있고, 좋은 인상을 보이라며 깨끗이 빨아둔 엄마의 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면접이 정직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저를 사로잡은 기생충 최고의 의상은 아들 기우의 반바지입니다. 백수일 때나 과외교사가 됐을 때도 늘 집에서 입던 꾸깃꾸깃한 반바지는 기우의 일상입니다. 가사도우미 문광(이정은)을 몰아내기 위해 복숭아털을 채취할 때도 입은 그 반바지 덕에 ‘반지하 인생’의 창백하고 가냘픈 기우의 종아리도 볼 수 있었고 복숭아털과 함께 휘날리는 여리여리한 다리털을 보며 괜스레 저도 콧등이 간지러웠으니까요. 제 마음에서 기생충은 아카데미 의상상도 수상했습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기생충#영화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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