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 대신…’ 자신을 위한 수다 떨며 행복해진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7일 17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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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책 한 잔 SNS 갈무리. 뉴스1
퇴근길 책 한 잔 SNS 갈무리. 뉴스1
“명절이면 전 언제나 친척들에게 ‘아직 결혼하지 못한 애’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오롯이 제 이름 그대로 불렸어요.”

25일 설날 서울 마포구 한 오피스텔. 이곳에선 오전 11시반경 흔치 않은 모임이 성사됐다. 이름도 특이한 ‘차례상 대신 브런치’다. 명절마다 여성에게 중노동으로 전락한 차례상 차리기를 거절하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잔 취지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다들 가슴에 이름표를 달았다. 20대 후반 주남정 씨도 왼쪽에 ‘남정’이란 표가 붙었다. 미혼인 그는 “지난해 추석 때도 ‘결혼 언제 하느냐’ ‘그러다 애 못 낳는다’를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다”며 “오늘은 ‘뭘 할 때 행복한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만 4시간 넘게 얘기했다. 오로지 ‘내 자신’에 대한 대화였다”고 말했다.

‘차례상 대신…’은 올해 초 설을 앞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불씨가 피어올랐다. 한 여성이 “여성끼리 모여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는데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실제로 이날 ‘차례상 대신 수다상’ 등 조금씩 이름을 바꾼 모임이 서울과 인천 등 전국 8곳에서 이뤄졌다. 참가자도 8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모임에 온 여성은 모두 닮은 점이 있었다. 그동안 이들에게 명절은 ‘핵노잼’이었다. 주 씨는 “명절마다 큰어머니는 우리 자매에게 안 쓰는 그릇까지 꺼내 닦으라고 시켰다. 설거지를 마치면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며 몸서리쳤다. 또 다른 참가자 김지양 씨는 명절하면 ‘배틀(battle·전투)’이란 단어가 떠오른단다.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벌어지는 친척들의 미묘한 신경전. 몸도 마음도 긴장과 녹초를 반복하다 명절이 끝난다.

그래서였나. 참가자들은 이번 모임이 너무나 ‘꿀잼’이라 입을 모았다. 무슨 특별한 이벤트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기 속내를 편안하게 털어놨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세요?” “존댓말이 편한가요, 아님 반말로 해볼까요.” “혹시 오이 싫어하나요? 못 먹는 반찬 알려주세요.” 그런데도 까르르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밝은 표정으로 바뀐 그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사랑하는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 괴로워진 건 왜일까.

“실은, 전 사과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명절에 사과 깎는 건 항상 제몫이었죠. 줄곧 인상을 찡그렸지만, 누구도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묻지 않았어요. 참, 최근엔 스스로 충격도 받았습니다. 가장 살가운 친척이 사촌오빠인데, 결혼한 언니 이름조차 기억 못하더라고요. 의무와 희생만 강요하다 제일 중요한 건 놓친 건 아닌지… 반성 많이 했습니다.”(김지양 씨)

오후 4시쯤 ‘차례상 대신…’ 모임이 마무리됐다. 참가자들은 “이제껏 이렇게 재밌는 명절은 처음”이라며 헤어지길 아쉬워했다. 기혼자 직장인 정예인 씨는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이렇게 흥미로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그들에게 명절에 필요한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약간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대화였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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