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집권세력發 궤변과 선동… 실종된 수오지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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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권력 수사팀 사실상 해체시키고… 공정인사·직제개편으로 분칠
궤변·선전술은 최고 수준인데…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은 실종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 평양방송은 “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 조치로 반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 내려온 박헌영 등은 민족주의 인사들을 불러 선무공작을 요구한다. 하지만 동족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며 거부하자 박헌영 등은 “전쟁을 일으킨 건 이승만”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며칠 전 3·8선 전역에 걸친 인민군의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을 수많은 사람이 목격했는데도 뻔뻔하게 북침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박헌영도 그런 거짓말이 통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아주 오랫동안 6·25 북침설은 심대한 위력을 발휘했다.

좌파 학자들은 교묘히 취사선택한 팩트들을 엮어 북침설, 남침유도설, 국지충돌확전설 등을 전파했고, 19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수많은 학생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북한정권, 특히 동족상잔을 일으킨 원흉으로 규정됐던 김일성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 수정을 가능하게 했고, 그 결과 김일성을 우상시하는 수많은 주사파가 생겨날 수 있는 토양이 됐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의 본질을 정반대로 색칠하는 선전술. 흑과 백을 뒤바꿔놓는 논리, 역사를 입맛대로 윤색하는 좌파 이론가들의 책략은 교묘하고 집요하다. 명백한 사실을 정반대로 선전하고, 비판에는 귀를 닫는다. 그러면서 회색의 논리들을 무수히 퍼뜨려 진실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8인사에 이어 어제 검찰 중간간부 인사로 현 정권을 겨냥한 수사팀들을 사실상 공중분해시켰다. 하지만 정권의 언어로는 최고의 공정성을 지닌, 직제개편에 따른 공정한 인사라고 한다.

권력 핵심실세를 겨냥한 수사가 진행되는데, 만약 떳떳하다면 더 마음껏 수사해보라고 일부러라도 인사를 늦추면서 보장해주는 게 상식적 대응이다. 그런데 그 어떤 비난도 아랑곳없이, 그 어떤 명분이나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수사간부들을 좌천시킨다.

필수 보직기간 1년을 규정한 인사규칙을 넘어서기 위해 직제개편까지 동원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 시행 시기는 빨라도 7월 이후인 데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사라지기 때문에 형사부를 급히 늘려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직제개편이 발등의 불인 것처럼 서둘렀다.

정년퇴임한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수십 년 공직생활 내내 한번도 듣도 보도 못 하던 일들이 요즘 벌어진다”며 “하다못해 군사정부 때도 직제개편을 하려면 이해당사자 그룹 의견도 듣고 공청회도 하고 그랬다”고 말했다.

사적(私的)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일을 벌이면서도 개혁이라고 강변한다. 그들은 안다. 아무리 궤변과 억지라도 지지층에겐 스스로를 옹호하고 무장할 논리를 제공해주고, 결국은 진실을 회색으로 덮어버리는 효과가 생길 것임을.

실제로 청와대와 여당 인사들이 온갖 스피커를 동원해 흑백 바꾸기 논리를 펴면 곧 유시민 등이 나설 것이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수많은 기사가 유포될 것이다. 채널을 두세 번만 바꿔가며 퍼뜨리면 반신반의하던 이들도 따라오고, 확신편향에 빠진 지지자들이 여론을 형성해줄 것이다.

최근 ‘4+1’을 통한 법안 강행에서 검찰 인사까지, 일련의 독주 과정에서 집권세력이 주로 동원하는 논리는 ‘법대로’다. 그런데 법대로를 내세우면 불리할 것 같을 때는 법보다 국민여론, 정의가 우선이라며 집단의 힘에 의지한다. 누군가를 법이 정한 임기 때문에 쫓아내기 어렵게 되면 집 앞까지 찾아가 시위를 벌여 ‘정의를 구현’한다. 자기편이 다수결로 밀어붙일 때는 “법대로”를 외치다가 검찰이 법원 영장을 들고 오면 논리를 싹 바꿔 거부한다. 실정법과 국민정서법, 두 대립되는 것 가운데 언제든 편리한 걸 골라 쓴다.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안 느낀다. 구시대적 선악 세계관으로 무장해 있기 때문이다. 추미애 장관은 김대중 정권 시절 언론사 기자를 향해 “사주의 지시로 글을 썼느냐. 사주 같은 놈”이라고 욕설을 했다. 자신들을 향해 제기되는 비판에는 무조건 비도덕적 동기가 숨어있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이다.

외형적 합법과 선전술을 양대 무기로 삼은 정권의 폭주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준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퇴행 조짐이 나타나고, 여러 나라에서 ‘선출된 포퓰리즘 독재자들’이 유사(類似) 전체주의 통치를 하고 있지만 미국 같은 선진국은 의회 사법부 싱크탱크 등 국가의 인스티튜션들이 권력자의 폭주를 견제해준다. 그러나 한국은 거의 일방 독주다. 행정부는 물론 입법 사법부도 정권에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길목을 차지했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행동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뺨칠 수준인데 죄책감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수오지심의 실종이다. 성현들은 수오지심이 없는 사람은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4·15총선이 그래서 더더욱 중요하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수오지심#문재인 대통령#추미애 장관#조국 수사팀#청와대#4+1 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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