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과학기술 창작문예]박성환 ‘레디메이드 보살’ 당선

  • 입력 2004년 11월 2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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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도한 로봇이 사람들에게 설법까지 한다면 이 로봇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국내에서 처음 개최된 ‘2004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단편소설 부문에서 당선된 박성환씨(26)의 ‘레디메이드 보살’이 던지는 화두다. 이 작품은 대거 125편이 참여한 예심을 뚫고 본심에 오른 수준작 5편의 치열한 경합 끝에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중편소설 부문에는 장기이식용으로 배양기 속에서 자라는 복제인간을 다룬 김보영씨(29)의 ‘촉각의 경험’, 아동문학 부문에서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남미자씨(50)의 ‘풀꽃이 된 사람들’, 만화 부문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물에 잠기는 지구를 탈출하는 ‘21세기 노아의 방주’를 그린 박지홍씨(27)의 ‘HOTEL:SINCE 2079’가 각각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특히 남씨의 작품은 먼 훗날 지구에 영혼은 사람이되 식물처럼 움직일 수 없는 생명체가 살게 될 것이라는 16세기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고, 박씨의 만화는 인간의 DNA를 담아 우주로 보낸다는 유럽우주기구(ESA)의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실제 연구체험과 과학지식을 소개하는 수기 부문에서는 당선작이 없었다. 대신 장영우씨(52)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가작에, 안성진씨(33)의 ‘가자 가자 우주 그너머로 우주는 영원하다’가 우수작에 뽑혔다.

이번 창작문예에는 대학교수, 정부출연연구소 박사, 과학저술가 등이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셨고,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만화 부문에는 초등학생이 참신한 작품으로 어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번 공모전은 국내에서 처음 펼쳐진 과학문예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5개 부문에 걸쳐 총 286편의 작품이 참여하는 등 많은 관심을 모았다. 공동심사위원장인 서울대 영문학과 김성곤 교수(언어교육원 원장)는 “과학기술 창작문예는 과학에 대한 이해와 재능을 겸비한 과학문예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한국과학문화재단, 동아사이언스가 주최하고 과학기술부가 후원한 이번 공모전의 시상식은 ‘세계 과학의 날’인 1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다. 당선작 상금은 중편 1500만원, 단편 700만원, 아동문학과 만화는 500만원. 수상작과 심사평, 그리고 수상소감의 전문은 인터넷(stl.dongaScience.com)에 게재된다.

이충환 동아사이언스기자 cosmos@donga.com

■ 수상소감

● 단편소설 당선자 박성환 “득도한 로봇이 설법한다면…”

8년 전에 시작했던 습작이 졸업, 취직과 함께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아무런 평가나 조언 없이 홀로 글을 쓰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마치 나침반 없이 사막을 헤매는 듯한 막막함에 이제 그만 접자,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이번 공모전은 나에게, 철든 이후 줄곧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SF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정리할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다행히 녹슨 머리에 착상 하나가 새로 떠올라 넉 달 만에 자판을 두드렸다. 본디 욕망을 가지지 않았기에 해탈의 상태로 조립된 로봇과 그 로봇에 대한 세상의 반응-과학은 자신이 불러온, 그러나 자신의 범주를 초월한 결과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동안 엉성한 습작들을 읽어주셨던 네트워크 속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 중편소설 당선자 김보영 “우린 모두 부모님 복제인간”

나는 늘 글을 쓰고 싶어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놀이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백지를 보면 구토증이 났다. 그 당시에는 병이 너무 깊어,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글을 한편이라도 쓴다면 그대로 인생을 마감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이건 그런 때에 썼던 글이다.

복제인간에 관해 항간에 떠도는 환상에 대해서는 SF가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결국 이 소설도 그런 편견을 더하는 소설이 돼버렸다(사람을 장기 제공용으로 기를 수야 없지 않겠는가). 복제인간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부모님의 복제인간이다. 그걸 인공적으로 했다고 해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펜도 칼과 같은 것이다. 날을 갈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그러니 칼을 갈려고 한다. 몇 년이든, 평생이든.

● 아동문학 당선자 남미자 “과학동화로 꿈을 전할게요”

지난밤 누군가에게 코트를 입혀 주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해몽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빚 독촉을 받을 흉몽’이란다. 그때 당선 전화를 받은 것이다. 얼떨떨했다. 입은 자꾸만 저절로 벌어져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크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통쾌했다. 다시 해몽을 당선 소식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살았던가?

초등학교 때 ‘해저 2만리’를 읽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나를 감동시킨 것은 소설의 내용보다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실제 잠수함이 발명되기 전 쥘 베른이라는 소설가의 상상의 산물이었다는 점이었다.

그 후 나는 공상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이 다음에 훌륭한 작가가 되어 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무한한 꿈을 주리라 상상을 하곤 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과학동화 전문작가가 되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 만화 당선자 박지홍 “온난화 재앙 미리 막아야죠”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효과로 지구가 금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이론을 접하게 되면서 이번 작품을 그리게 됐다.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움과 동시에 지구의 모든 생명이 사라져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는 과학자를 그려보고 싶었다.

SF라는 장르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어설픈 지식이 생기자 모자란 나로선 감히 손댈 수 없는 영역처럼 생각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건 미래에 대한 꿈과 무한한 상상력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SF 명작과 작가들이 나를 이끌어주고 있었다.

작품을 낼 수 있게 독려해주신 나의 스승님께 감사드린다.

■ 심사평

이번 문예전에서 심사위원들이 합의한 것은 우리 사회가 과학소설의 불모지라는 사실과 ‘과학기술 창작문예’가 과학소설의 밑거름이 돼야 한다는 희망이었다. 거기서 두 가지 심사원칙이 나왔다. 응모작품의 수준과 관계없이 모든 부문에서 당선작을 낸다는 것과 모방이나 번안을 너그럽게 대하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예상보다 많은 작품이 들어왔고 수준도 기대보다 높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글을 쓴 응모자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단편소설 부문에서는 본심에 오른 5편 모두 수준이 높았다. 특히 당선작 ‘레디메이드 보살’은 인공지능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불교의 맥락에서 다뤄 심사위원들의 지지를 많이 얻었다. 로봇과 노인 사이의 관계를 그린 ‘노부’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었지만 뜻밖의 결말을 위한 준비가 부족했다.

중편소설은 단편 응모작보다 다소 수준이 낮아 역시 중편이 쓰기 힘든 장르라는 통설을 일깨워줬다. 당선작 ‘촉각의 경험’은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자란 복제인간을 다룬 것으로 작가가 중편의 균형감을 잃지 않고 작품을 이끌어 나간 점을 높이 샀다.

아동문학 부문은 여러 작품에서 기존 아동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풍부한 상상력과 문학적 모험을 읽을 수 있었다. 당선작 ‘풀꽃이 된 사람들’은 통념적인 과학소설에서 나아가 참신한 상상력과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키움 박사의 눈물’은 사건이 긴박하고 짜임이 튼실하지만 결말에서는 주제의 상투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수기(논픽션) 부문에서는 평면적인 보고서 형식의 글이나 픽션 냄새가 진한 글들이 많았다. 당선작을 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가작과 우수작으로 각각 선정한 2편은 과학에 대한 사랑과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보이는 글들이다.

만화 부문에서는 ‘HOTEL:SINCE 2079’를 당선작으로 뽑았는데 ‘기후 변화로 인한 인간의 멸망과 DNA의 보존’이라는 소재가 돋보였다. 초등학생이 그린 ‘사이언스 어드벤처’는 연필로 그리고 크레파스로 꼼꼼하게 색칠까지 했으며 3명의 캐릭터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솜씨가 앞으로 큰 기대를 하게 했다.공동심사위원장 김성곤·복거일

● 심사위원 명단

▽소설(중·단편) △본심:김성곤(서울대 언어교육원 원장) 복거일(소설가) △예심:고장원(SF 평론가) 박상준(SF 평론가) 이한음(SF 작가)

▽아동문학=김이구(문학평론가) 안미란(아동문학가)

▽수기(논픽션)=최재천(서울대 교수)

▽만화=이두호(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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