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조 김선정·지휘자 구자범의 ‘구텐 아벤트’를 다시 무대로 불러낸 팬들의 힘

  • 스포츠동아
  • 입력 2019년 6월 20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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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복판, 낯선 광고가 달린 버스가 지나간다. 파아란 글씨로 ‘Guten Abend(구텐 아벤트)’라고 적혀 있다. ‘구텐 아벤트’는 독일어 저녁인사로 영어의 ‘Good evening’쯤 된다. ‘구텐 아벤트’ 버스광고의 주인은 기업의 상품광고도, 대박 흥행을 위한 영화나 뮤지컬 광고도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성악가가 노래하는 1인 음악극이다.

메조 소프라노 김선정이 노래하고 지휘자 구자범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 1인 음악극은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7월 4일과 5일 단 이틀간 열린다. 이 홀의 객석은 불과 300석 남짓. 그나마 2층은 닫고 1층 객석만 오픈한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돈 안 되는’ 작은 공연에 버스광고가 뜬 사연은 무엇일까.

이 음악극은 원래 메조 소프라노 김선정이 지난해 독창회를 준비하는 중에 시작되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계 살롱 음악과 카바레 음악을 중심으로 여러 노래들을 모아 독창회를 준비하던 김선정은 피아노 반주를 맡은 구자범과 의기투합하여 새롭게 편곡하고 편집해서 아예 새로운 1인 음악극으로 만들어버렸다. 오페라 가수와 지휘자로 오랜 시간을 독일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했던 두 사람의 음악성과 무대경험이 녹아든 합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기에 오스트리아 비엔나라고 하는 가장 보수적인 도시에서, 오페라 극장이라는 더더욱 보수적인 무대를 꿈꾸던 유태계 여자 성악가 롤라 블라우의 파란만장한 삶을 ‘파아란’ 노래로 그려낸 작품인 클라이슬러의 ‘호이테 아벤트: 롤라 블라우’를 기반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다른 독일계 작곡가들의 살롱 음악을 엮었다.

아름다운 가사이지만 매우 어렵고 양이 워낙 방대해서 원어민조차 암보로 부르기 꺼려하는 1시간 반 분량의 이 노래들을 어린 시절부터 독일에서 유학한 김선정이 직접 번역하였고, 한때 영화제 자막번역 팀에서 일했던 구자범이 다듬어 자막으로 만들어냈다.

연출, 조명과 소품까지 모두 직접 기획하고 준비했다. 600여 석의 객석 중 앞좌석 300석만을 오픈해 객석과 무대를 가깝게 만들었다.


‘구텐 아벤트’는 2018년 8월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되었고, 무대의 노래는 관객의 가슴을 울렸다. 대중적이지만 품위 있고, 유려하지만 강렬하고, 감상적이지만 감동적이었다. 국내에 전무후무했던 새로운 공연에 음악계뿐만 아니라 연극계, 무용계 인사들까지 깜짝 놀랐다. 게다가 이토록 정성을 들인 좋은 작품이 단 1회 공연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더더욱 놀랐다.

이후 관객들의 앙코르 공연 요청이 쇄도하였으나 국내 예술계의 여러 여건상 공연을 다시 올리기 어려웠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관객들이 서서히 모여 자발적으로 후원회(회장 최현숙)를 조직해 펀드를 만들고 앙코르 공연을 기획했다. 공연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후원하고, 심지어 광고까지 책임진 것이다. 이는 좋은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하여 재공연을 성사시킨 우리나라 초유의 일대 사건이다.

‘구텐 아벤트’ 앙코르 공연 버스 광고는 시장논리에 따라 나온 통상적인 홍보물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다하려는 참 예술가들과 이들을 알아보고 공연의 감동을 다시 나누고자 하는 음악 애호가들이 합작해 만들어낸 예술계의 의미 있는 첫 상징인 것이다.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그저 무대를 통한 자아실현만을 꿈꾸던 롤라 블라우가 시련을 겪으며 점차 사회에 눈을 뜨게 되는 극의 내용처럼, 이번 ‘구텐 아벤트’ 앙코르 공연은 예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구자범이 국내에서 처음 상임지휘자로 활동한 오케스트라의 도시인 광주광역시에서도 공연을 연다. 7월 11일, 유스퀘어 금호아트홀에서 같은 무대가 펼쳐진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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