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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 시급한데…교통 범칙금조차 교통안전에 못 쓰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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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 시급한데…교통 범칙금조차 교통안전에 못 쓰는 나라

서형석 기자 입력 2019-04-15 18:22수정 2019-04-1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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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경부고속도로 한남~양재 6.8km 구간의 콘크리트 중앙분리대 높이는 약 80㎝다. 1.3m인 양재~부산 구간보다 50cm 정도 낮다. 1990년대까지는 전국의 고속도로 중앙분리대 높이가 80㎝였다. 그러다가 버스나 화물차 같은 대형 차량이 중앙분리대를 넘어 반대 차로로 진입하는 사고를 막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분리대 높이를 1.3m로 올리는 작업이 시작됐다. 그런데도 한남~양재 6.8km 구간의 분리대 높이는 여전히 80㎝다. 2002년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이 구간 관할권을 넘겨받은 서울시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분리대 개선사업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남~양재 6.8km 구간 중앙분리대 양옆으로는 전용차로를 이용하는 버스들이 하루 14시간(오전 7시~오후 9시) 동안 마주보고 달린다.

한남~양재 구간 중앙분리대처럼 개선이 시급한 교통안전 시설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 하지만 관련 예산 부족을 이유로 제때 개선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통안전 예산 수요 증가


2014년 9월부터 올 3월까지 행정안전부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안전 신문고’에 접수된 신고의 29.2%인 22만3139건이 교통안전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시설안전(39%)에 이어 2번째로 많았고, 세 번째인 생활안전(11%)보다 2배 이상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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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운전자의 운전면허증 자진반납제를 시행 중인 지자체에서는 면허를 반납하려는 고령 운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달 15일 70세 이상 운전자를 대상으로 면허증을 반납할 경우 10만 원 상당의 교통카드를 지급하기로 하고 1000명 분을 준비했다. 그런데 운전면허를 반납하겠다는 운전자가 보름 만에 3000명이 몰렸다. 서울시 관계자는 “추가경정 예산으로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는 모든 운전자에게 교통카드를 지급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의회는 65세 이상 운전면허 보유 시민 중 1%만 면허를 반납한다고 해도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연 평균 9억 원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운전면허 자진반납제를 시행 중인 다른 지자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령 운전자의 면허증 자진반납제처럼 교통안전을 위한 예산 수요는 늘고 있다. 야간에 잘 보이지 않는 차선, 반사경이 없는 곡선 구간의 시야 사각지대, 노후한 방호울타리, 부족한 과속단속 카메라처럼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지금보다 1000명 줄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맞추려면 예산이 투입돼야 할 곳이 많다.

상황은 열악하다. 지난해 17개 광역지자체가 각 지방경찰청에 요청한 교통안전시설 예산은 모두 5390억 원이었다. 광역지자체들은 회전교차로 확충, 어린이 통학로 보도 설치, 횡단보도 등 차선 재도색 등에 필요하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요청액의 87.4%인 4713억 원만 지급됐다. 부산은 107억 원을 신청해 76억 원(71.5%)을 받았고, 경남과 경북은 각각 신청액의 67.7%와 62.4%를 받는데 그쳤다.

곳간엔 여유가 있다. 지난해 경찰은 과태료와 범칙금으로 7985억 원을 거둬들였다. 2015년 이후 매년 8000억 원 가량이 과태료와 범칙금으로 걷히고 있다. 운전자들은 이 돈이 교통안전을 위해 재투자될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돈은 교통안전과는 관련이 없는 일반회계로 편입된다.

●교통안전 시설 위한 특별회계 필요

해결책으로는 ‘교통안전시설 특별회계’가 제시된다. 교통안전과 관련한 시급한 투자를 위해 과태료와 범칙금 수입의 20% 가량은 교통안전을 위해서만 쓸 수 있도록 별도의 예산을 두자는 것이다. 미국, 영국, 일본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국내에서도 2003¤2006년 ‘자동차교통관리개선특별회계’를 도입해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 안전개선, 보행로 설치, 무인단속 카메라 설치 등의 사업을 전국적으로 벌인 적이 있다.

국회에서도 특별회계 도입에 대한 공감대는 마련돼 있다. 여야가 발의한 법안들이 현재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하지만 기획재정부의 반대가 거세다. “경찰청의 요구를 받아 연간 28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주고 있으니 별도 회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게 기재부 측 논리다. 여기에는 교통안전과 상관없는 계약직 인건비 등이 포함돼있고, 고령 운전자 대책 같은 새로운 현안은 반영돼있지 않다.


▼ 교통벌금 재원으로 교통안전 확충하는 일본

일본에서 후지산을 끼고 있는 야마나시(山梨)현 후지가와구치코(富士河口湖)정은 2만5000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데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한 정재계 유력 인사들의 별장과 리조트, 호텔 등이 많아 일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는 지역이다. 2017년 한해에만 458만 명의 관광객이 이 곳을 찾았다.

도쿄에서 버스나 철도 교통편을 이용해 이곳을 방문한 내외국인 관광객들은 도보와 자전거 등을 이용해 가와구치(河口) 호수 주변을 둘러본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4일에도 가와구치코역을 포함한 곳곳에서 배낭을 멘 많은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이날 가와구치코의 도로마다 보행자들은 차도와 경계석으로 분리된 보도를 안전하게 거닐었다. 도로 노면의 흰색 도색은 차선과 횡단보도 모두 깔끔했다. 곡선 구간 도로에서는 마주 오는 차선의 모습을 반사경이 운전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중앙정부로부터 받은 ‘교통안전대책 특별교부금’으로 갖춘 것들이다. 지난해에만 교부금 250만 엔(약 2600만 원)이 투입됐다.

교통안전대책 특별교부금은 일본 총무성이 매년 3월과 9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에 지급하는 교통안전 관련 예산이다. 한해 거둬들이는 교통법규 위반 과태료와 범칙금이 재원(財源)이다. 교통법규 위반 통지서 발송과 관리 비용을 제외한 전액을 지자체에 준다. 미우라 신사쿠(三浦晋作) 후지가와구치코정 건축계장은 “교부금은 평소 교통안전을 위해 시설개선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곳에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며 “최근에는 경찰, 학교 등과 함께 통학로 개선에도 나서고 있다”고 소개했다.

일본 총무성은 지난해 교부금 527억8900만 엔(약 5360억 원)을 지자체에 지급해 신호등 설치, 표지판 보수, 노면 도색, 방호울타리 설치 등에 사용하도록 했다. 지자체별 교부금 액수는 각 지역의 교통사고 발생 건수와 인구 수, 도로 길이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결정한다. 교통안전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인식 아래 지자체의 재정 여건과 관계없이 모든 지자체에 지급한다.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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