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유영]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여자들의 해시태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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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낙태죄_폐지, #낙태죄_여기서_끝내자 등 낙태 관련 해시태그가 유독 많았다. 임산부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잇달아 글을 올리며 이런 해시태그를 붙인 것. 이는 그동안 바뀐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기도 하고, 11일 낙태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를 이끌어내는 추동력이 되기도 했다.

해시태그는 #를 가리키는 해시(hash)와 꼬리표(tag)의 합성어. 문구 앞에 해시태그를 달면 동일한 해시태그를 붙인 게시물이 한꺼번에 나온다. 검색을 쉽게 하기 위해 쓰인 해시태그가 특정 주제에 관심과 지지를 표하는 식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국내에서 해시태그가 힘을 얻게 된 건 2015년. 한 방송인이 “이슬람국가(IS·이슬람 무장단체)보다 무뇌(無腦)아적 페미니즘이 위험하다”고 말하자 여자들은 즉각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를 붙인 글을 올리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여자에게 무시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생판 모르는 여자를 살해하자 여자들은 #살아남았다로 추모 운동을 벌였고 몰카 범죄가 드러날 때면 #디지털_성범죄_아웃으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런 ‘해시태그의 힘’은 #미투(MeToo·나도 당했다)에서 제대로 발휘됐다.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가 생성되며 연극 영화 방송 분야의 폭로가 잇따랐고 이는 #스포츠계_내_성폭력, #교회_내_성폭력, #회사_내_성폭력 등으로 확장됐다. 충북여중에서 촉발된 #스쿨미투(학내 성폭력 추방 운동)는 80개에 육박하는 중고교의 학생들이 목소리를 냈고 올해 9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의제로 다뤄질 정도로 국제사회의 관심까지 이끌었다.

일상의 편견에도 여자들은 해시태그로 응수했다. 여자는 잘 모른다는 걸 전제로 남자가 과하게 설명하는 맨스플레인(man+explain)에 ‘#오빤다알아ㅎ’로 맞받아치고 시군구별 가임기 여성 수를 표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제작한 정부에는 ‘#나는_가임여성이다’로 여성을 출산 기계로 보고 사회적 문제인 저출산을 여성 개인 탓으로 돌리는 시각에 집단 항의했다(사이트는 하루 만에 폐쇄됐다).

여자들은 왜 해시태그를 많이 쓰게 됐을까. 이는 익명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데다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즉각 연결될 수 있는 소셜미디어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 잭 도시 트위터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1박 2일의 짧은 방한 기간에도 여성단체를 만나 “한국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트위터에서 10, 20대 사용자가 절반에 이르는데, 공정함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일수록 일상의 차별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회적인 이슈에 의견을 표하려 하고,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다.

물론 소셜미디어에도 혐오가 만연하고 거짓뉴스도 확산되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숨겨져 왔던 폭력과 차별, 편견,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은 이에 공감과 지지를 표하며 무언가를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해시태그로 연결되고 해시태그로 묶이면서 그 연결은 더 강해졌다. 바로 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우리 딸이 더 잘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세상은 조금씩 나아가는 것 같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해시태그#sns#낙태죄#미투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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