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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제국주의 후예들에 설마 하다 기습당한 아마추어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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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제국주의 후예들에 설마 하다 기습당한 아마추어 정권

이기홍 논설실장 입력 2019-07-12 03:00수정 2019-07-1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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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하게 칼 갈아온 日 경제보복… 제국주의 시대 ‘征韓論’ 망상 깔려
설마 했던 文정부 기업과 미국 기대는데
기업은 자기 살 깎으며 타개책 찾을 것
美 움직이려면 우리도 대안 내놓아야
이기홍 논설실장
“경제 교류는 정치와 다르게 봐야 한다.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관계를 우려하는 일본 기업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 게 3월 28일이었다. 외교 관계가 나빠져도 경제는 무탈하게 굴러갈 거라는 판단에 많은 이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여 만인 7월 1일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가 나왔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일본 발표 직후 우리 정부의 태도였다. 설마 대비를 안 했을까 싶었는데 정말로 ‘설마’ 하며 별다른 대비를 안 한 것으로 드러났다.

올봄 일본 자위대 초계기 사건 당시 경제계 지인으로부터 “일본이 세정액(에칭가스) 하나만 통제해도 우리 반도체 공장이 다 멈춰 선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미국 등 해외 백화점이나 전자제품 매장에 가면 삼성·LG 제품이 최고급 대접을 받고 일본 제품들은 진열대 뒤편에 처박혀 있는 걸 보며 느꼈던 뿌듯한 마음과, 부품·소재 산업에서 우리가 그렇게 뒤져 있다는 진단 사이의 괴리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언론이 한일 관계를 방치하면 경제에 피해가 올 거라고 우려하는 글을 숱하게 실었는데도 집권세력은 마이동풍이었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8개월 넘게 뒷짐 진채, 문 대통령이 뜬금없이 친일 청산을 어젠다로 제기하며 ‘친일 대(對) 반일’ 프레임을 설정할 때, 집권세력 내에 일본의 이런 보복을 예상한 의견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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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1960년대부터 일본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왔으며, 기판 절삭기 하나만 공급 안 돼도 휴대전화 생산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정밀기술 장비 의존이 심하다는 걸 아는 이들이 있었을까.

일본이 이중(二重) 용도 전용 우려를 이유로 통제할 수 있는 품목 리스트가 약 1200개에 달하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만 가지고 있는 원천기술이어서 대체 불가능한 게 상당수라는 걸 아는 이들이 있었을까. 비확산체제 수출통제 시스템은 물품만이 아니라 기술 물질 장비 등을 포괄하는 것임을 경계한 이들이 있었을까.

이 정권의 친일 프레임이 이번 사태를 불러온 건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설정한 친일 프레임이 여권 내에서 한일 관계에 대한 진언을 움츠리게 만든 건 사실이다. 올봄 한 여권 인사는 “대통령이 싫어하니 일본 얘기는 하기 꺼려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물론 이번 사태의 주된 책임은 경제를 무기화해 자유무역시대 국제 분업의 암묵적 약속을 깬 아베 신조 총리에게 있다. 금수(禁輸)라는 확정적 보복 대신 칼자루 쥔 측의 재량권과 가변성이 큰 심사라는 방식을 택해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근거 없는 전략물질 유출 의혹까지 제기하는 아베 정권의 행태는 극악하고 저열하면서도 치밀했던 제국주의 시대 일본 정치권력의 속성을 데자뷔처럼 떠올리게 한다.

아베 정권의 치밀한 보복 근저에는 징용 판결 등에 대한 대응 차원을 넘어서서 ‘잃어버린 20년’ 동안 세계시장에서 한국 기업에 밀린 데 대한 자괴감에서 어떻게든 한국에 타격을 줘 끌어내리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일본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은 2013년 11월 ‘한국의 급소를 찌른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배상금을 징수당하면 금융 제재로 응수해야 한다. 그러면 삼성도 하루 만에 괴멸할 것”이라는 일본 금융계의 주장을 전한 바 있다. 기사엔 “아베 신조 총리는 노골적으로 한국을 비하하고, 측근들은 ‘새로운 정한(征韓·한국 정벌)’을 제기하고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런 아베 정권에 맞선 문재인 정부의 당장의 대책은 기업들을 앞세우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우리 기업들이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아낼 것이라 생각한다. 삼성 등 우리 글로벌 기업들의 생존력과 위기 대응력은 세계 최고다. 어떤 바터(물물교환)를 하든 당장의 위기를 넘길 방도를 찾을 것이고, 그 덕분에 정권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경제위기로 번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당장의 위기를 넘긴다 해도 절벽 끝에서 밑지며 한 흥정들은 장기적으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갉아먹을 것이다.

이 정부가 또 하나 기대는 곳이 미국인데,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을 급파했지만 현재로선 미국이 징용문제에 대해 중재력을 발휘할 여지는 크지 않다. 사실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2000년대 중후반엔 미국 워싱턴에는 일본보다 한국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북한이 테러단체와 불량국가로 핵물질 등 대량살상무기를 확산시키는 걸 막는 게 최우선 관심사였기 때문에 한국과의 공동대응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중국 견제다. 일본은 이에 적극 협력하는 최고의 파트너지만 한국은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다.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우리가 대안을 가져가야 한다. 무턱대고 미국이 나서달라고 하면 “우리도 말발에 한계가 있다”며 난감해할 것이다. 지난번 우리 정부가 일본에 비공식 제안한 타협안보다 더 진전된 안을 들고 가야 미국도 움직일 공간이 생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일본 경제보복#한일 관계#강제징용 판결#아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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