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발굴 특종]30살 어린 행정관 앞에서 펑펑 울어버린 朴

  • 신동아
  • 입력 2019년 5월 16일 13시 47분


코멘트

‘마지막 비서관’의 ‘대통령 박근혜 최후 140일’ 수기
1부 ‘폭풍’의 서막

“최순실에 이 정도로 배신당할 줄 몰랐습니다”
“최가 진짜 그런 사람인가요, 세 비서관은 알려줬어야지”

● JTBC ‘빈 총’에 까무러쳐 백기(白旗) 투항
● 朴, 조윤선에 “꿈 많고 섬세하게 잘하고 계셨는데…”
● 2차 담화 전 ‘눈물의 讀會’, 무능했던 참모들
● 靑 참모들, ‘최순실 모른다’ 잡아떼 초기 대응 실패
● 3인방·수석 사표에 朴 “모두가 다 떠나가야 하나요”
● ‘최순실 조기 귀국’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 종용
● 윤전추 “‘퇴직 세 비서관’ 연결해볼까요?” 朴 “아뇨”

이영선 “최순실 수상하다” 先보고, 3인방 묵묵부답
30살 어린 윤전추 앞에서 펑펑 울어버린 朴

《 이 연재물 각 회의 수기는 2014년 7월부터 3년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낸 필자 (천영식) 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결정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사저로 돌아가기까지, 박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의 육성과 에피소드를 담았다. 각 수기는 박 대통령의 직무정지로 공식 기록이 없던 ‘박근혜 시대’ 마지막 기록이자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각 수기는 현장 기록과 관련자 진술을 바탕으로 작성됐으며, 명확하지 않은 기억은 당시 참모들의 집단 기억을 빌렸다. ‘신동아’는 각 수기 내용 중 실제와 다른 ‘팩트’에 대한 지적이 있다면 그 또한 지면에 반영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

연재를 시작하며

이 글은 박근혜 대통령을 미화하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니다. 지나온 과거에 대한 반성적 회고이자 역사의 기록이다. 언젠가 누군가는 되도록 있는 그대로 박근혜 정부와 박 대통령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하고 남기게 될 것이다. 그 숙명이 나의 작업이어야 한다면 회피하지 않겠다고 생각해왔다.

박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그 자체로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다. 탄핵으로 마무리된 비정상적이고 무능한 정부로 낙인찍혀 있다. 박 대통령에게 동정심만 보여도 색안경을 끼고 본다. 대통령은 칠순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에 2년 이상 감옥에 수감돼 있고, 차가운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탄핵정국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역사의 요청에 어느 정도의 응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이 늦었다. ‘없는 역사’ 취급만 할 수 없는 것이고, 일방적인 정보만 기록되도록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가 막을 내린 뒤 지난 2년간 만난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도대체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하는 본능적인 물음이 뒤따라왔다.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있을 수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소명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한민국 역사는 유유히 흘러갈 것이며 또 전진할 것이다. 보수나 진보를 떠나 대한민국 정부를 운영하는 모든 이에게 교훈이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박근혜 정부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탄핵 당시를 중심으로 다룰 예정이다. 그 시기는 이른바 ‘문고리 3인방’ 등 측근이 존재하지 않은 시간이다. 2년 반째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돼 있었다. 내가 이 작업을 맡게 된 이유다.

내가 기억하고 추측한 박 대통령의 생각이 자칫 코끼리 다리 만지듯 일부분을 과장한 게 되지 않을까 항상 우려하면서 조심스럽게 글을 채워갈 것이다.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박근혜 정부 참여자로서 국정운영의 잘못된 점은 국민께 거듭 사과드리며, 대신 오해가 있는 부분은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국가를 염려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많은 분에게 조그만 위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2016년 12월 9일 대한민국 국회는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에 대해 탄핵소추안을 의결했다.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였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지만, 탄핵안은 가결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이듬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최종 결정될 때까지 겨울잠으로 빠져들었다. 대통령은 겨울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어둡고 힘들었던 비극적 역사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그날 마지막 국무회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2017년 3월 10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2017년 3월 10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은 국회 표결이 끝난 그날 오후 곧바로 국무위원 간담회를 비공개 소집했다. 과거 노 대통령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일종의 티타임같은 비공식 행사였지만 대통령이 주재한 마지막 회의이자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행사가 됐다. 공식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침울한 분위기는 예상했지만, 참석자 모두의 가슴은 쇳덩어리를 달고 있는 듯 고통스러웠다.

박근혜 대통령은 감정을 억누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부덕이고 불찰입니다. 국가적 혼란에 송구합니다. 국회와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 혼란을 잘 수습해주기 바랍니다. 헌법과 법률의 절차에 따라 헌재 심판과 특검 조사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가겠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헌재 결정 때까지 합심해서 국정 공백을 최소화시켜 주십시오. 취약계층의 삶을 잘 살피고 민생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미래 성장동력도 잘 키워주십시오. 국민은 공직자를 믿고 의지합니다.”

이날 대통령의 마지막 인사는 연설비서관이 써주지 않았다. 대통령이 혼자 생각해서 쏟아낸 액면 그대로의 대통령 말이다. 탄핵 시기에는 대통령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여러 사건이 이어졌고, 그런 탓에 대통령이 직접 상황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그랬다.

오랫동안 감정절제술이 몸에 밴 탓인지, 대통령의 발언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인생의 수많은 굴곡을 견뎌왔듯 대통령의 마지막 발언은 차분했고 담담했다. 정작 사회를 본 이석준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이 흐느끼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장관들이 돌아가며 위로와 향후 국정운영의 각오를 피력했다. 경제부총리를 시작으로 교육부총리, 외교, 국방장관 등의 순으로 장관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장관들은 대부분 비통한 마음과 책임감 등을 토로했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리고 황교안 국무총리 차례였다.

“결과가 송구스럽습니다. 저부터 응당 책임을 지는 게 도리입니다. 하지만 국정의 공백이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게 된 황 총리 역시 말과 행동을 절제했다.

대통령은 총리와 장관들의 인사를 들은 뒤 마무리 발언을 했다. 이때는 각 장관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눴다. 가장 먼저 조윤선 문화체육부 장관을 거명해 “꿈 많고 섬세하게 잘하고 계셨는데…”라며 각별히 안타까워했다. 조 장관이 구속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였는데도, 조 장관을 특별히 염려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조 장관은 이듬해 1월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됐다.

生과 死 이별 같던 눈물의 작별

마지막으로 이석준 국무조정실장까지 거론하며 “산더미 같은 일을 잘 조정하느라 고생했다”고 위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리고 참석자들에게 정말 최후의 고별사를 이어갔다.

“제 일은 여기서 멈추지만 총리가 직무대행으로 난국을 맡아 처리하게 된 게 마음이 놓입니다. 저를 도와주셨듯이 대행을 중심으로 책임감 갖고 잘 해주시길 바랍니다.”

대통령은 그러다가 감정이 격해졌다. 대통령은 갑자기 흐느끼면서 “피눈물이 난다”고 했다.

“마음 아플 줄 알았지만 마음속 피눈물이 이런 것이구나…한 분 한 분 (열정을)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국정과제를 못 하게 되고, 힘이 못 돼주는구나…이게 마음속 피눈물이 납니다.”

참석자들이 같이 흐느꼈다. 일부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대통령 몫까지 나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떠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멈춰 섰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흔들림 없이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3년 동안 대통령이 참석하는 청와대의 모든 행사에 대부분 배석했다. 아마 의전비서관보다 더 많이 행사에 참석했을 것이다. 이날 행사는 배석한 마지막 공식 일정이기도 했다.

생과 사의 이별 같던 그날의 장면이 아직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대통령은 물론 장관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남아 있다. 대통령은 장관들과 다시 일일이 악수하며 헤어졌다. 약 36분간 이어진 장관들과 눈물의 작별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희망은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다. 대통령은 그날 비통해했지만, 그래도 직무정지 시기를 거치면 희망이 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눈물은 쏟아냈지만, 최대한 절제하면서 고통을 삼켜나갔다. 그러나 박근혜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방패가 뚫렸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2016년 12월 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정세균 국회의장이 2016년 12월 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간 사건의 결정적 시발점은 2016년 10월 24일 JTBC의 ‘최순실 PC’ 보도라고 생각한다. 이 보도로 최순실 사건은 둑이 터졌다. 그전에도 수많은 의혹 보도가 이어졌으나, 결정적 ‘한 방’은 나오지 않았다. 탄핵 정국의 이야기도 여기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JTBC의 ‘최순실 파일’ 보도는 과장과 왜곡이었지만, 최순실이라는 숨겨진 인물을 끌어내는 데는 충분한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다음 날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을 보고 언론들은 한껏 고무돼 ‘과장 보도’를 대대적으로 양산해갔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1차 사과 담화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 담화가 태블릿PC를 인정한 꼴이 됐고, 사태를 통제 불능으로 만든 최악의 대응이라는 것이다. 위기 시 잘못된 대응의 대표적 사례로 인용되고 있다. 어느 정도 인정한다.

당시 대통령이 1차 담화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 본인이 최순실의 잘못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훗날 당시 상황을 들어보면 대통령은 ‘단순히 연설문을 보내 의견을 물어보는 게 큰 잘못이겠느냐, 괜히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사실대로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자’는 매우 단순하고 명확한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나고 보면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지만….

대통령도 훗날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그때(1차 담화) 사과를 한 것은 연설문 표현, 홍보적 관점에서 (최순실을) 받아들인 게 다인데, 저렇게 (JTBC 보도처럼) 어마어마한 것이냐? 그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호성은 훗날 만기출소한 뒤 “일단 문건이 전달된 것은 맞고, 그 이상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건 전달 사실만큼은 인정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담화의 내용은 짧았다. 시인할 게 최순실의 연설이나 홍보 메시지 수정을 인정하는 데 국한됐기 때문이다. 길게 할수록 꼬일 여지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담화는 실패였다. 이날 담화는 대통령 입으로 최순실이라는 사람을 처음 실토하는 것이었다. 최순실이 ‘어려울 때 도와준 인연’으로 여전히 대통령 주변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최순실 존재에 대한 ‘커밍아웃’이다. 엄청난 일이다.

이 같은 휘발성에 비해 담화는 너무 짧았고, 내용도 감질났다. 청와대는 이제 국민과 언론의 후속적인 관심과 요구를 채워줘야 하는 부담이 생긴 것이다.

최순실이 한 게 그게 전부냐? 일정 기간이라는 게 언제까지인가? 그러면 각종 이권사업 등과 관련은 어떻게 되나?

실제 담화 이후 수많은 궁금증이 쏟아졌다. 그동안 최순실을 숨겨놓았을 뿐 공개됐을 때를 대비한 위기 대응 매뉴얼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청와대는 대비책이 없었다. 최순실이란 인물에 대한 폭발성만 배가시킨 뒤 후속 정보를 줄 게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면 작문이라도 해야 하는 게 언론의 속성이다.

‘잘못 끼운 첫 단추’ 1차 담화

1차 담화는 분명히 한계를 지녔지만,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류가 반복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참모들의 한계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첫째, 정보의 부재 및 쏠림 현상이다. JTBC 보도가 나간 그날 밤 청와대 인근에서 식사 중이던 참모들은 바로 청와대로 모여들었다. 해명을 해야 했지만 그날 밤 늦게까지 대응책을 결정짓지 못했다. 진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날 일사천리로 사과 담화 발표가 결정됐다.

대통령의 지시로 몇몇 수석과 정호성이 참여해 담화문을 준비했다. 담화문 작성은 정호성 주도로 이뤄졌다. 처음부터 정호성 외에는 사태 수습을 주도할 사람이 없었다. 정호성의 결정에 모두가 따라 간 것이다. ‘국정농단 사건’이라는 거대한 쓰나미에 대해 총체적 대응이 어려운 구조적 문제점이 시작부터 노정됐다. 정호성조차 최순실이 연설문을 받아간 것 외에 다른 비리와 연관돼 있다고는 생각지 않은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해 당시 최순실의 존재와 행태를 알고 있던 인물들이 대응 과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최순실 존재 알던 사람들의 침묵

그나마 정호성이 적극적으로 나섰을 뿐,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 이재만 총무비서관 등 최순실을 알고 있던 인사들은 여전히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극도로 말을 아끼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최순실이 이런 사람이어서 이렇게 대응하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대응에도 문제를 낳았다. 최순실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들이 사건 대응의 전면에 나서면서 위기 대응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는 1차 담화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문제점을 남겼다.

만약 정호성이 그렇게 일찍 구속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대응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란 게 당시 청와대 고위 참모들의 중론이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보니 초기 대응부터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훗날 만난 정호성도 이 대목에 대해 상당히 괴로워했다.

둘째, 최순실의 존재 공개에 대한 충격의 여파가 모든 것을 삼켰다는 점이다. JTBC 보도는 숨겨놓은 최순실을 단순히 ‘오픈했다’는 사실을 넘어 실제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말해주고 있었다.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다른 걸 생각하기 어렵게 했다. 최순실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일부 인사들은 사건이 미치는 파장을 우려해 오히려 몸을 숨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셋째, 당시엔 태블릿PC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실제 JTBC는 2016년 10월 24일과 25일 보도에서는 태블릿PC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고, 그저 ‘최순실 파일’ 혹은 ‘최순실 PC’ 등의 용어를 쓰고 있었다. 1차 담화는 태블릿이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사과였다. 최순실에게 문건을 보낸 건 맞기 때문에 이걸 중심으로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JTBC가 태블릿PC라는 용어를 보도한 것은 10월 26일 저녁 뉴스부터다. 최순실이 태블릿PC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부인한 보도는 27일 세계일보에서 나왔다. 25일 1차 사과 담화를 발표할 때는 태블릿이 논의의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1차 담화 때 태블릿PC의 존재를 부인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전후 관계 인식이 잘못돼 있는 것이다.

1차 사과 때 JTBC 보도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은 태블릿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연설문을 줬다는 자체를 부인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그건 곤란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연설문이 최순실에게 넘어간 것은 맞다고 정호성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순실의 존재, 연설문 전달 경위와 시점 등 내용 측면에서 조금 더 정교했어야 한다는 지적은 수용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 키워버린 ‘미숙한 담화’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태블릿PC 문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태블릿PC는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도 않고 제대로 공개되지도 않아 의혹을 증폭시켰다. 검찰이 JTBC를 과도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풀어야 할 최순실 태블릿PC 실체

이 때문에 태블릿PC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JTBC로 넘어간 석연치 않은 과정 등도 풀리지 않았다. 태블릿 기기의 실체가 있고 최순실 주변에 머물렀던 가능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순실이 태블릿을 통해 유의미한 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검찰과 법원이 국민적 의혹을 풀어줘야 할 문제라고 본다.

최순실과 3인방은 공동으로 소유한 G메일 계정에서 같은 아이디(ID)로 접속해서 문건을 볼 수 있었다. 여기 올라 있는 문건은 공유 폴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건 수정은 3인방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실제 해당 수석실에서 수정한 것을 정호성이 올려놓은 방식이었다고 한다. 죄가 있다면 그 공유 폴더를 최순실과 공유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태블릿PC 소유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와 별도로, 혹은 그와 상관없이 이미 JTBC는 ‘영리한 편집’으로 최대의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다. JTBC가 조작했기 때문에 성공한 게 아니다. 총알 한 방 없는 총으로 이미 여러 사람을 죽여버렸다. 진짜 총인 줄 알고 다 까무러쳐 죽은 것이다. 총알 소리 흉내를 너무 잘 냈고, 청와대는 백기를 들었다.

물론 JTBC 보도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비겁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연설문이나 여타 문건이 최순실에게 갔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사건이고 충격이다. JTBC 보도는 그런 측면에서 특종임에 틀림없다. 다만,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JTBC 보도의 도덕성과 적절성, 과장·왜곡 등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순실 사건은 최씨가 검찰에 긴급체포된 10월 31일을 맞아 절정으로 치달았다. 31일은 JTBC가 문건 보도를 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청와대는 일주일 만에 초토화됐다. 대통령 지지율도 그 전후로 급락했고, 국민적 불신감도 극대화됐다.

내부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우병우 민정수석, 김성우 홍보수석, 김재원 정무수석,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전 경제수석) 등은 이미 28일 밤 일괄 사퇴했다. 정호성·이재만·안봉근 등 3인방도 같이 물러났다. 청와대 보좌진은 공백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무기력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이었다. 사표를 내자마자 29일 정호성 등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면서 미처 대비가 안 된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떠난 자도 남은 자도 모두가 붕 떠 있었다.

“대통령은 정호성의 휴대전화가 압수되고 녹취가 공개되자 너무 황당해했다”고 윤전추 제2부속실 행정관(헬스트레이너)이 말했다.

“휴대전화는 왜 뺏기고 녹취는 왜 했나요?”

대통령은 윤전추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논란을 키울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국민들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했잖아요!”
2016년 11월 8일 정세균 국회의장과 회동하기 위래 국회를 전격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정국수습 방안과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등에 대해 논의했다. [국회사진기자단]
2016년 11월 8일 정세균 국회의장과 회동하기 위래 국회를 전격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정국수습 방안과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등에 대해 논의했다. [국회사진기자단]
그것은 우연한 사고였다. 정호성도 집에 옛날 휴대전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는 풀지 않은 옛날 이삿짐 속에 있었다.

JTBC는 물 만난 고기처럼 헤집고 다녔다. 31일 JTBC 8시 뉴스는 30꼭지 기사 중에 26건을 최순실 사건에 집중했다. 날씨가 추워졌다는 등 일반 기사는 네 건에 불과했다. 11월 1일 서울의 날씨는 영하 2도까지 내려가는 등 11월 기온치고는 뚝 떨어졌으나, 정국은 최순실로부터 얼어붙고 있었다.

다른 방송이라고 차이는 없었다.TV조선도 31일 저녁 7시뉴스에 최순실 사건과 관련해 28건의 뉴스 꼭지를 내보냈다. JTBC는 문건 유출 보도 다음 날인 25일 시청률이 7.77%에 달하는 등 최순실 뉴스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대통령도 참모들에게 면이 서지 않았다.

“어휴! 최순실이 국민들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했잖아요!”

대통령은 11월 초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분노와 허탈감을 표현했다. 대통령은 실제 최순실의 행태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국민들보다 더 놀랐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대통령은 강한 수습 의욕을 갖고 있었다. 3인방과 주요 수석들이 사퇴한 뒤 홀로 남아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자를 발표하는 등 동분서주할 때다. 하필 최순실이 귀국해 관련 비리가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을 때 총리를 새로 지명하고 수습 방안을 밀어붙이려니 탄력이 붙지 않았다. 고뇌의 시간이었다.

대통령은 11월 1일 나를 집무실로 불렀다. 3인방이 사라진 이후 빈 공간이 형성된 청와대의 의사소통 시스템 구축 등을 당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요 수석들도 사퇴한 만큼 업무에 공백이 없도록 노력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때 대통령에게서 극단적 위기의 징후는 없었다.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극복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대통령은 열심히 해보자며 격려했다. 우리 정부가 많은 일을 했는데도 최순실 비리에 가려서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나도 안타까웠다.

대통령은 또 사실이 아닌 보도에 대한 대응 방법을 주문했다. ‘이것이 팩트다’라는 청와대의 오보 대응 코너가 만들어진 것은 그 얼마 뒤다. 하지만 수많은 오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종범 경제수석과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최순실의 체포로 수사가 본격화하자 좋은 뉴스가 나올 리 없었다. 매일 새로운 비리 관련 뉴스가 국민을 분노케 했다.

2차 담화와 지지율 급락
1차 담화가 나온 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2차 담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1차 담화는 최순실에게 연설문이 전달됐다고 해서 사과한 것이다. 그런데 곧 이어 최순실의 각종 비리 혐의가 쏟아져 나왔다. 젊은 층에는 딸 정유라의 특혜의혹이 비난 여론을 자극하고 있었다. 최순실에 대한 분노는 대통령을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최순실이라는 인물을 알고 지낸 것만으로 죄인이 돼갔다.

2차 사과 담화를 통해 국민에게 좀 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민심을 추스르는 게 필요했다. 2차 담화 날짜는 11월 4일로 잡혔다. 1차 담화 후 10일 만이다. 열흘 만에 또 사과 담화를 한다는 자체가 사실상 청와대의 무장해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대통령은 뒷날 2차 담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도 몰랐던 이야기, 최순실이 사익을 취했다는 등의 내용은 제 불찰이라고 생각해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려 사과하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쏟아지던 비리 뉴스는 매일 책 한 권을 쓸 정도였다. 11월 2일 하루 동안의 언론 뉴스만 모아봐도 당시 분위기를 대략 알 수 있다.

명백한 오보와 실체가 불분명한 기사 등이 뒤엉켜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모두 국민을 분노케 한 쟁점들이다. 2차 담화는 이 같은 분위기를 감안해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일단 의혹을 누그러뜨리는 게 급선무였다.

사과와 검찰 조사 및 특검 수용을 기본 뼈대로 하면서도 해명할 것은 해명한다는 기조였다. 해명이 부족하다는 게 당시의 지배적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담화가 길어졌다. 1차는 짧아서 문제였는데, 2차는 너무 길어져서 문제였다.

대국민 사과뿐 아니라 수사를 받게 된 공무원, 기업인에 대한 미안함, 검찰수사 협조 및 특검 수용 의사,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겠다는 다짐, 각계 지도자와 소통 의지 등을 두루 포함했다. 대통령은 사이비 종교나 굿에 빠져 있다는 엉터리 뉴스에 항상 힘들어했고 직접 국민에게 설명하고 싶어 해 포함됐다.

“알맹이가 빠졌다”…냉혹한 평가

평가는 냉혹했다. 사이사이 녹아 있는 국가 및 국정에 대한 걱정 등이 오히려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또 담화는 길었지만 정작 최순실과의 관계에 대한 해명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준 사람’이라는 말로는 최순실 비리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되지 않았다. 최순실이 꼭 필요했던 이유와 관계를 계속 유지한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 등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김병준 총리 내정자에게 전권을 실어준다는 내용도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담화의 알맹이가 부족하다는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다.

무엇보다 2차 담화를 발표하는 날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대통령 지지율 5%를 발표한 것은 치명타였다. 이 조사는 11월 1~3일 이뤄진 조사를 4일 공개한 것이다. 그 전주 지지율 17%보다 무려 12%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담화에 따른 여론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과다. 그런데 담화와 동시에 발표가 나니 마치 담화 자체가 국민에게 전혀 지지를 못 얻은 것처럼 돼버렸다. 담화의 반응을 기다려보기도 전에 대통령은 여론조사기관에 의해 이미 ‘식물대통령’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지지율 5%는 국민들로부터의 심리적 지지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담화를 보고 대통령의 마음을 이해하려던 사람들도 지지율 5% 소식에 ‘집단 냉소심리’로 돌아섰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2차 담화의 약효는 없었다. 이 때문에 또 ‘2차 담화를 왜 했느냐’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사실 2차 담화는 많은 준비 과정을 거쳤는데도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고’였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이나 참모들의 인식 수준에 문제점이 있음을 드러낸 셈이다. 그 당시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으나 국민의 기대에 많이 미흡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반성하고 있다. 어디서 문제가 있었을까.

2차 담화 독회와 참모들의 무능
대통령은 2차 담화의 무게감을 충분히 인식했다. 1차 담화 후 열흘 만에 만신창이가 됐고 여론이 급속히 싸늘해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1차 담화가 너무 쫓기듯 이뤄졌다는 반성이 청와대 내에서 있었기에 2차 담화는 잘 준비하자는 기류가 높았다. 대통령은 담화 준비를 위해 관련 참모들을 모아 독회(讀會)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것까지 좋았다.

참모들도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담화 준비에 참여했다. 하지만 참모들이 담화를 주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참모들은 오히려 대통령의 심중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했으며, 이를 통해 대응의 큰 줄기가 잡혀가기를 갈구했다.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의존적으로 돼 있었다. 대통령은 독회 때 참모들을 상대로 최순실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실제 관련 논란이 발생한 뒤 최순실 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을 알 수 있는 ‘첫 기회’였다.

“선거 때마다 ‘믿고 있어요’라고 말하던 국민들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왔습니다. 부응하고 보답해야지 생각해왔습니다. 이번에 무너지면서 국민의 신뢰가 깨진 게 제일 마음 아픕니다. 권력형 비리는 내가 제일 증오했던 일입니다. 허탈합니다. 국민들 마음 아프지 않게 하려 했는데 의도하지 않게 반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굿이나 사이비 종교 믿는다니 가슴이 찢어집니다. 이조차 저의 불찰입니다. 모든 게 최순실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순실과 연결 부분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모든 공무원의 노력이 비리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헌법 가치 망가지지 않도록, 나는 사명감으로 일해왔습니다. 국민 마음 아프게 하려고 대통령 된 게 아닙니다. 차라리 대통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자괴감이 듭니다. 각오는 매일매일 다졌습니다. 지금 저는 언론보도 보고 같이 놀라고 있는 상황입니다.”

朴 향한 ‘보호막’에 냉정함 잃어

대통령의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대통령의 참회의 발언을 들으면서 위안이 됐다. 대통령이 충분히 잘못이라고 느끼고 있고, 반성도 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대통령이 독회 때 했던 이런 심경을 그대로 담화에 반영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뼈대는 그렇게 됐다.

그런데 독회 때 대통령의 발언에 비해, 실제 담화는 불필요한 사족이 많아졌다. 성장동력을 꺼뜨리지 않아야 한다거나 안보와 경제를 걱정하는 내용 등은 사족이었다. 정부의 기능을 살려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검찰 수사 때문에 모든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다는 발언도 불필요했다. 진실을 회피하는 듯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담화는 최대한 콤팩트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정확하게 꽂아야 한다. 잘못을 반성하면 됐지, 국민들이 이해할지 여부는 진정성을 보고 추후에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이해를 촉구하는 내용이 많아진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사족이 많아진 데 대해 그 정도로 걱정하지 않았다. 사과도 충분히 담고 있으니, 하고 싶은 ‘호소’도 충분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안일했던 것이다. 특히 대통령 입장을 많이 배려했다. 대통령이 많이 힘들 텐데, 저 정도는 들어가도 괜찮을 것이라고 미리 대통령을 향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대통령을 위해 담을 내용을 충분히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급자 위주의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담화 준비 과정에서 대통령이 눈물을 많이 흘린 탓도 있겠지만, 대통령을 측은하게 여겼다. 위기의 순간에 참모는 더 냉정해야 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2차 담화의 내용 중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라는 표현도 강하게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패러디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향후 파장을 우려하는 의견을 대통령에게 개진했다. 하지만 표현을 삭제하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당시 대통령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표현이 있어야 하며, 그런 표현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2016년 11월 4일 청와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년 11월 4일 청와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은 지나온 삶의 전부가 흔들리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 느낌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라는 표현으로 응축돼 나온 것이다. 대통령도 독회 과정에서 ‘차라리 대통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자괴감이 든다’고 말한 만큼 이 같은 정서를 담화에 표현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패러디로 연결돼 비판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라고 에둘러 얘기했고, 대통령은 그것을 각오하고 그 표현을 썼다. 물론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독회 때 대통령이 최순실 비리와 관련해 당시 언론보도를 보고 놀라고 있다고 말했을 때 불안감을 느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안도감을 우선시했다. 대통령도 최순실 비리를 잘 모르고 있다면, 최순실과 비리로 얽힌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그래서 대통령 입장을 더욱 배려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본인도 모르는 최순실의 비리인데, 반성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여러 가지 사족이 늘어나게 된 배경이 됐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대통령도 사건의 전모를 모르고 있다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검찰과 야당에 의해 향후 사태가 어디로 번져나갈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건 불안감의 원천이지만, 당시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독회를 마무리할 때쯤, 나는 대통령에게 담화 때 무슨 옷을 입을 생각이냐고 물었다. 민감한 시기인 만큼 의상도 신경이 쓰여서 말한 것이다. 대통령은 웃으면서 말했다.

“의상도 걱정되나요? 회색 정장을 입으면 되지 않을까요.”

걱정이라기보다는 확인이 필요해서 말한 것인데, 오히려 먼저 ‘걱정되냐’는 말로 참모의 긴장을 풀어주려 한 걸로 이해했다. 대통령은 이미 담화 때 의상도 생각해두고 있었다. 대통령은 독회 후 곧바로 나에게 회색 정장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 복잡한 와중에도 참모가 챙긴 것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응대해준 것이다. 그런 소소한 일들은 잘 챙기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암시도 들어있었다고 생각한다.

참모들 사이에 대통령에 대한 연민이 형성된 것도 이즈음(11월 초)이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스킨십을 부쩍 늘린 영향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 이전 2년 반을 전부 합친 것보다 이 시기에 더 많은 접촉을 했고, 여타 수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통령이 눈물을 가장 많이 보인 것도 이때다. 며칠 동안 계속 눈가가 부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깊은 자괴감에 빠져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못한 채 밤새 눈물 흘린 게 아닌가 싶다.

참모들과 회의를 하다가도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잦았다. 2차 담화를 준비하기 위한 독회에서도 예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워낙 많은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늦추어 다시 독회를 했고, 대통령은 그때에도 참모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참모 대부분은 이때 대통령의 눈물을 처음 목격했다.

대통령이 담화 준비과정에서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담화 발표 당일에도 눈물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정작 2차 담화 당일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다소 떨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국민 앞에서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더욱 독한 사람으로 각인됐다.

한꺼번에 사표 제출한 참모들
탄핵 사태를 회고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는 최순실의 귀국 문제다. 흔히 하는 말로 ‘일도이부삼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도망가고, 부인하고, 마지막에 ‘빽’을 쓰라는 말이다. 이건 검찰과 경찰을 불신하던 권위주의 시대에 유행하던 은어이자, 민간 수사 대응 요법이다. 내가 학생운동을 할 때 귀가 따갑게 듣던 운동권 요법이기도 하다.

범죄 혐의가 드러나면, 멀쩡하던 사람도 도망가는 판인데, 이미 독일로 도피해 있던 최순실을 왜 무리하게 귀국시켰느냐는 지적이다. 순전히 피의자 측 입장에서 본다면, 최순실의 귀국이 너무 빨랐다는 지적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검찰은 수사 초기에 이미지 만회를 위해 무리한 수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검찰의 특별수사본부 발족과 동시에 자진해서 최순실을 불쏘시개로 밀어 넣은 셈이 됐다. 검찰은 수사를 시작하자마자 3인방과 안종범, 최순실 등 핵심 인물들을 모두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검찰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략적 판단을 하기에는 당시 청와대 안이 너무나 어수선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3인방과 우병우 수석 등이 10월 28일 한꺼번에 사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사퇴 직전의 참모들은 향후 불어닥칠 검찰수사 등에 대한 본인들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한편으론 그렇게 하는 게 당시로선 사태를 진정시키고 대통령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국 대응에 대한 팀워크 플레이가 잘 되기 어려웠다. 대통령은 향후 대응책을 꼼꼼하게 상의할 참모가 없었다.

“모두가 다 떠나가야 하나요.”

당시 대통령이 한 말이다. 대통령도 당시 홀로 남겨지는 느낌이었음을 보여준다.

최순실 범죄 궁금해 한 대통령

이런 가운데 대통령이 최순실의 귀국을 종용하는 전화를 한 게 10월 28일이었다. 대통령이 최순실 귀국이 필요하다고 봤다면, 26일과 27일이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28일 통화로 연결된 것이다.

나중에 보니 26일과 28일은 이틀 차이지만, 정국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24일 JTBC 보도 이후 검찰은 27일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면서 이전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수사에 달려들었다. 이른바 검찰이 정권에 본격 반기를 든 시점도 이즈음이라고 본다. 이영렬 당시 특별수사본부 본부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검사로 몰려 ‘팽(烹)’을 당했지만, 이때는 사생결단식으로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검찰부터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어찌 됐건 당시 최순실을 귀국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국민이 모두 최순실 수사를 촉구하고 있었다. 특히 대통령조차 어디까지가 최순실의 진짜 범죄인지 알고 싶어 했다. 최순실은 당시 미르·K스포츠재단에서 돈을 먹은 게 없다면서 억울해했다. 본인이 억울하다는데, 들어와서 해명하라는 것이 청와대의 기류였다. 대통령은 이미 최순실 의혹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9월 중순부터 의혹이 있으면 직접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최순실을 도피시키는 게 가능한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이미 최순실의 독일 거주지는 드러난 상태였다. 최순실도 독일에서 변호사를 확보해 대응하고 있던 상태이기도 했다. 최순실이 잘잘못을 구분해서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다못해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로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최순실 귀국 미스터리 전말
최순실 씨가 2017년 5월 29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동아일보]
최순실 씨가 2017년 5월 29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동아일보]
물론 최순실 입장에서는 대통령을 믿고 귀국했을 수 있다. 여전히 대한민국 대통령이니, 지켜줄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국을 유리하게 해석하고 싶었던 시기다.

최순실이 귀국을 늦췄다면, 얼마간 더 늦출 수 있었을까. 최순실이 귀국하지 않는 동안 대통령은 여론의 압박을 견딜 수 있었을까.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모든 게 실패한 역사에서 나오는 미련일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대통령이 본인과 관계된 문제에서만큼은 떳떳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비록 비난을 받을지라도 의혹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비참한 대통령이 되더라도 비겁한 대통령이 되지는 않겠다.”

당시 청와대의 기류였다. 참모들이 건의한 내용이고, 또한 대통령이 받아들인 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쿨’하게 최순실 귀국 종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최순실은 박 대통령에게 어떤 존재일까. 이것은 최순실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다. 국민들은 그것을 알고 싶어 했다. 대통령은 최순실의 역할을 감지할 수 있는 표현을 몇 번 사용했다. 대통령은 1차 담화에서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은 2차 담화에서 조금 더 진전된 표현을 사용했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 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고,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추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통령은 1, 2차 담화를 통해 크게 ①홀로 사는 데 필요한 개인사를 도와주는 사람, ②연설·홍보 등에서 의견이나 소감을 주는 사람, ③어려움 혹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고 도와준 사람 등 3가지 메시지를 준 것이다.

대통령은 통상 소소한 개인사를 도와준 사람으로 많이 표현해왔다. 하지만 ②③은 조금 더 존재감이 실리는 해명이다. 연설·홍보 등에서 역할은 하기 나름이다. 잘하면 아주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고, 아니면 자문 수준이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도와준 사람이라면 은인일 수 있다. 이 표현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상위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담화 때 표현이다. ‘최순실과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은 이번 사건의 성격과 대응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대통령은 말을 아꼈고, 참모들도 적극적으로 캐묻지 못했다.

영부인? 말벗? 최순실의 의미

특히 대통령의 여러 가지 표현은 최순실의 존재를 조금은 이해하게 했지만, 너무 절제된 표현이어서 대중에게는 구체적인 느낌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괴물’이 돼 있는데, 이 정도 표현으로 납득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명하려면, 공감할 수 있는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최순실의 존재에 대해 조심스럽게 두 번 정도 개인의 느낌을 피력한 적이 있다. 대통령으로부터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다. 우선 최순실이 사실상 ‘영부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통상 남자대통령에게 나타나는 영부인의 역할이다. 불행히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영부인 역할을 대신할 남편이 없었다. 비극이었다. 그것을 ‘일정 부분’ 최순실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부인의 역할은 위의 3가지가 모두 해당되는 영역이다. “연설 어때? 이 표현 괜찮아?”라고 가장 편하게 물어보는 대상도 부인이며, 어려운 시절 곁을 지키는 것도 부인의 역할이다. 대국민 연설이나 접촉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을 갖고 있다.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싶을 때 가장 편하고 쉽게 물어보게 되는 대상이 부인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최순실의 ‘영부인 역할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언론은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겨레신문은 2016년 11월 1일 ‘최순실이 퍼스트레이디? 청와대 제2부속실서 전담 보좌’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물론 한겨레의 시각은 순수한 의미의 ‘영부인론’이 아니다. 관저에서 최순실이 잠자고 갔을 것이라는 의혹을 밑바닥에 깔고 음험한 유착 이미지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의 기사였다. 이 기사를 보고 ‘아차’했다.

이때 청와대가 영부인론을 내세웠으면 큰일 날 일이다. 물론 나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최순실이 영부인 역할을 했다고 발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많은 사람이 정서적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대통령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비리에 개입하는 것은 영부인의 역할이 아니다. 최순실은 무슨 말로 규정을 하든 비난 세례를 피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보니, 최순실은 관저에 왔다고 하지만 대통령의 침실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제한된 관계’였다.

대통령에게 건넨 두 번째 의견은 “말벗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대통령은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편하게 얘기할 상대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편하게 얘기할 상대’라는 점이다. 영부인이 아니라면 말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한참을 생각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대통령은 그저 “소소하게 도와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대화를 나눈 게 2차 담화 전후의 시기였다.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최순실과 그렇게 많은 말을 나누지 않습니다. 이혼을 했는지, 딸(정유라)이 개명을 했는지 이런 것들도 모두 이번에 알았습니다. 저는 최순실의 개인사를 잘 모릅니다. 말벗이라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관계인데,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은 최순실을 충직한 ‘집사’쯤으로 생각했다는 뜻으로 들렸다. 최순실은 재판에서 “대통령에게 충신이 되고자 했다”고 말했다. 종합해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에게 사적 공간의 ‘집사’ 역할을 하며 ‘충신’으로 비치길 원하던 최순실은, 대통령이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악용해, 밖에서 위세를 떨며 다양한 ‘나쁜 짓’을 하고 다녔다는 게 된다. 이건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다.

윤전추 앞에서 울어버린 대통령
‘문고리 3인방’이라고 불린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왼쪽부터). [동아DB]
‘문고리 3인방’이라고 불린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왼쪽부터). [동아DB]
당시 대통령의 심경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를 또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대통령과 윤전추에 관한 내용이다. 윤전추에게 우연히 듣게 됐지만 특이한 장면이라고 생각해 기록용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즈음 대통령은 제2부속실 행정관으로 헬스트레이너를 했던 윤전추에게 마음을 열었다. 윤전추는 대통령의 개인 물품 등을 조달하며 사적 영역을 책임지는 최근접 비서였다. 대통령의 은밀한 영역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통령과 최순실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대통령과 윤전추가 ‘대화’를 한 것은 2차 담화를 마친 그 주 일요일(11월 6일)이다. 윤전추는 대통령의 건강을 위해 가벼운 운동을 같이하면서 2시간 동안 대통령과 대화했다. 윤전추는 그런 대화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대통령을 옆에서 모셨지만, 말을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다. 대통령은 말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윤전추는 늘 대통령을 어려워했다. 모든 비서는 대통령을 어려워한다. 대통령에게 위기가 찾아오면서 뒤늦게 윤전추가 ‘친구’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날 따라 대통령은 윤전추에게 “4년 동안 어떤 게 제일 기억에 남느냐” “해외순방 가서는 어느 나라가 기억에 남느냐”는 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을 이것저것 물었다. 그 나라에서 무엇이 맛있었는지 서로 대화하고 맞장구치며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최순실 이야기로 이어졌다. 당시 대통령은 매일같이 보던 신문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나고 견딜 수 없어 신문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대통령은 윤전추에게도 항상 존댓말로 이야기했다.

“이 정도로 배신당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다. 윤전추는 너무 놀랐다.

“그렇게 앞만 보고 일했는데 결과가 당황스럽습니다. 열심히 일했는데…최순실 내용을 언론을 통해 알게 되니 당황스럽습니다.”

대통령은 아예 흐느꼈다. 마음에 담은 회한을 아무 데도 풀 곳이 없으니, 서른 살 나이 차이의 어린 비서인 윤전추에게 설움이 폭발한 것이라고 본다.

“내가 나라를 위해 일요일도 없이 일을 했는데 너무 속상합니다. 나라만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는데,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됐나요.”

대통령은 감정이 복받쳐와 펑펑 울었고, 윤전추도 같이 울었다.

윤전추가 “3인방에게서 최순실의 행실에 대해 들은 게 없었느냐”고 묻자, 대통령은 “이렇게 될 때까지 세 비서관 중 보고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윤전추는 그동안 보고 느꼈던 최순실의 이중적 행실과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통령은 깜짝 놀랐다.

최순실의 ‘행실’ 보고한 행정관들
이영선 전 청와대 경호관(왼쪽)과 윤전추 전 행정관. [동아일보]
이영선 전 청와대 경호관(왼쪽)과 윤전추 전 행정관. [동아일보]
당시 관련자들에 따르면, 이영선·윤전추는 3인방에게 △최순실과 고영태 간의 미묘한 기류 △최순실의 고압적 태도 △최순실에 대한 부정적 세평 등 개인적인 행실에 대해 “수상하다”며 몇 차례 보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3인방 입장에서는 행실의 문제점을 비리로 규정할 수 없었고, 비리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두 행정관의 전언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기도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3인방은 이번 재판 과정에서 최순실이 기소된 각종 혐의를 통해 비로소 그 범죄행위를 알게 됐고, 최순실이 자신들(3인방)마저 철저히 속였던 것에 대해 경악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사건이 터지자 3인방에 대해 섭섭함을 가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문제가 있었으면 선제적으로 대응해 더 크게 번져나가는 것을 사전에 차단되길 바랐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사석에서 “최순실이 진짜 그런 사람인가요? 최순실이 내 앞에서 한 번도 티를 낸 적이 없습니다. (3인방도) 사태가 이렇게 안 좋게 됐으면 나에게 알려줘야 하는데…”라며 3인방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일까. 3인방이 사표를 내고 나간 어느 날 윤전추가 “전화번호를 갖고 있는데 연결 한번 해볼까요?”라고 물었으나, 대통령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제1차 대국민 담화문(2016.10.25)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최근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제 입장을 진솔하게 말씀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아시다시피 선거 때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듣습니다.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같은 맥락에서 표현 등에서 도움 받은 적 있습니다.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은 있으나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습니다.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제2차 대국민 담화문(2016.11.4)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먼저 이번 최순실 씨 관련 사건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실망과 염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정을 맡겨주신 국민 여러분께 돌이키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드려서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저와 함께 헌신적으로 뛰어주셨던 정부의 공직자들과 현장의 많은 분들, 그리고 선의의 도움을 주셨던 기업인 여러분께도 큰 실망을 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저의 지시로 추진된 일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 모든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로 일어난 일입니다. 저의 큰 책임을 가슴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어제 최순실 씨가 중대한 범죄 혐의로 구속되었고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등 검찰 특별수사본부에서 철저하고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검찰은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히고, 이를 토대로 엄정한 사법처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이미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에도 검찰의 수사에 적극 협조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 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습니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 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고,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추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돌이켜 보니,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국민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로 노력해왔는데 이렇게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어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입니다. 심지어 제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온 국정과제들까지도 모두 비리로 낙인찍히고 있는 현실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부의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만큼은 꺼트리지 말아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다시 한번 저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미 마음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었지만, 앞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습니다.

그동안의 경위에 대해 설명을 드려야 마땅합니다만, 현재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일일이 말씀드리기 어려운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자칫 저의 설명이 공정한 수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오늘 모든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것뿐이며 앞으로 기회가 될 때 밝힐 것입니다. 또한 어느 누구라도 이번 수사를 통해 잘못이 드러나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저 역시도 모든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국내외의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는 만큼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히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더 큰 국정 혼란과 공백 상태를 막기 위해 진상규명과 책임 추궁은 검찰에 맡기고, 정부는 본연의 기능을 하루속히 회복해야만 합니다.

국민들께서 맡겨주신 책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각계의 원로분들과 종교 지도자분들, 여야 대표님들과 자주 소통하면서 국민 여러분과 국회의 요구를 더욱 무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천영식
● 1965년 경북 청송 출생
● 대구 영신고, 서울대 서양사학과
●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 前 문화일보 정치부 부장 대우,워싱턴특파원
● 前 홍보기획비서관(박근혜 정부)
● 現 KBS이사, 계명대 초빙교수
● 저서 ‘고독의 리더십’(2013) 외

전 대통령비서실 홍보기획비서관·계명대 초빙교수 youngsikchun@gmail.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9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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