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2일

“우리의 독립사상 애국정신은 피와 뇌에서 나온다”

공유하기 닫기
원본보기
3·1운동이 일어난 뒤 조선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연방론, 자치론, 조선통치개혁론, 조선통치론 등이 그것입니다.

장덕준 기자
논설반원이자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으로 활약했던 추송 장덕준(1892~1920)은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부터 13일까지 10회에 걸쳐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칼럼을 연재해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따지고, 우리 동포들에게는 자중자애하며 힘을 키울 것을 촉구했습니다. 여기서 소요(騷擾)란 사전적으로는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남’이라는 뜻이지만, 1919년 일어난 3·1운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장덕준은 ‘평양일일신문’ 기자를 하다 1915년 일본 유학을 떠나 3·1운동을 맞기까지 현지에 머물러 일본어와 일본 학계 사정에 정통했습니다. 또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비분강개 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폐병이 깊었던 장덕준은 흥분하면 책상을 치며 분개해 피를 토한 일도 있었고, 논설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 격렬해지면 책상을 집어던지며 “이 따위 소리를 하고도 나라를 위한다는 놈이라 할 수 있느냐”고 독설을 내뱉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런 성격이었으니 일본 어용학자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를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장덕준은 서론에서 일한의 병합은 일본 민족에게는 국운의 성쇠에 관한 문제이지만, 조선 민족에 대해선 존망(存亡)의 문제라고 전제한 뒤 대표적인 두 일본 학자의 논문을 분석했습니다. 교토제국대학 법학교수 스에히로 시게오(末廣重雄)가 1919년 7월 잡지 ‘태양’에 게재한 ‘조선자치론’과 같은 대학 법학교수 오가와 고타로(小川鄕太郞)가 1919년 11월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 신문’에 기고한 ‘조선통치론’이 그것입니다.

스에히로 교수는 3·1운동이 일어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미국 선교사의 사주(使嗾)나 천도교주 손병희의 음모가 아니라 도(道)를 상실한 일본의 통치, 즉 총독의 무단정치와 조선인 차별대우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어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에 대해 일본어를 쓰고, 일본인과 같은 교육을 받도록 하는 등 동화정책을 펴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성공한 예가 없으니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지요. 이에 대해 장덕준은 스에히로 교수에 대해 ‘공정한 비평가’라 말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지만 ‘독립의 능력이 없는 조선인에게 독립을 허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조선의 자치만 허용하면 다수는 만족하리라 생각한다’는 등의 논리는 결코 수긍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장덕준은 오가와 교수의 조선통치론에 대해서는 서릿발 같은 비판을 가하며 그 허구를 하나하나 까발렸습니다. 그는 ‘조선에는 다수의 무식자가 있으며, 다수한 무식자는 독립의 이상이 없다’고 한 오가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응합니다. ‘조선인의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은 혈액과 뇌수에 의해 발생한다. 결코 소수 야심가와 선동가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선각자와 유식자를 단속, 압박하더라도 조선혼과 독립사상은 추호도 타격받을 리 없다.’ 그는 또 일제의 기만적인 ‘일시동인주의(一視同仁主義·일본인도, 조선인도 같은 황국신민이니 차별 없이 다룸)’에 대해 강자와 약자를 평등한 처지에서 자유경쟁하게 하는 것은 불공평하며 조선인의 저항을 융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장덕준은 친동생인 설산 장덕수와 함께 100년 동아의 주춧돌을 놓았지만, 너무나도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만주 훈춘(琿春)에서 우리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나자 현지로 달려가 취재하다 한국 언론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고 맙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朝鮮(조선) 騷擾(소요)에 對(대)한 日本(일본) 與論(여론)을 批評(비평)함 (一·일) - 秋松(추송)...1920년4월2일1면

序言(서언)

回顧(회고)하건대 日韓(일한)의 倂合(병합)이 成立(성립)된 以來(이래), 임의 十有餘(십유여) 星霜(성상)에 達(달)코저 하는도다. 뜻이 잇는 者(자) 엇지 歲月(세월)의 迅速(신속)함에 對(대)하야 太息(태식)치 아니함을 어드리오. 日韓(일한)의 倂合(병합)은 朝鮮(조선)民族(민족)에 對(대)하야도 全無(전무)의 일이엿스며, 日本(일본)民族(민족)에 對(대)하야도 全無(전무)의 일이엿도다.

또 그럴 뿐만 안이라 其(기) 關係(관계)는 朝鮮民族(조선민족)에게도 至重至大(지중지대)하며, 日本民族(일본민족)에게도 至重至大(지중지대)하고 東洋平和(동양평화)에도 重大(중대)한 關係(관계)가 잇도다. 然(연)이나 其(기) 中(중)에도 其(기) 關係(관계)가 第一(제일)노 重大(중대)하고 또한 緊切(긴절)한 者(자)는 朝鮮民族(조선민족)이로다. 日韓(일한)의 倂合(병합)이 日本民族(일본민족)에 對(대)하야는 其(기) 國運(국운)의 消長(소장)에 關(관)한 問題(문제)라 할진대 朝鮮民族(조선민족)에 對(대)하야는 民族(민족)의 存亡盛衰(존망성쇠)에 關(관)한 問題(문제)이로다. 換言(환언)하면 日本民族(일본민족)에 對(대)하야는 發展(발전)에 關(관)한 問題(문제)라 하나 朝鮮民族(조선민족)에 對(대)하야는 存廢(존폐)에 關(관)한 問題(문제)로다. 이와 갓치 日本(일본)과 朝鮮(조선)을 勿論(물론)하고 共通(공통)하야 有史(유사) 以後(이후)로 空前(공전)의 大事(대사)이며, 兩(양) 民族(민족)에 對(대)하야 一(일)은 其(기) 運命(운명)의 消長(소장)에 關(관)하야 至重至大(지중지대)한 關係(관계)가 有(유)하며, 一(일)은 其(기) 存廢(존폐)에 對(대)하야 至重莫大(지중막대)한 關係(관계)가 有(유)한 問題(문제)에 對(대)하야 日本(일본) 及(급) 朝鮮(조선)의 兩(양) 民族(민족)을 勿論(물론)하고 日韓(일한)의 倂合(병합)이 成立(성립)되야 十年(십년)에 垂至(수지)하도록 其(기) 利害關係(이해관계)와 得失(득실) 如何(여하)와 運命(운명) 如何(여하)에 對(대)하야 一句(일구)의 批評(비평)과 一切(일절) 言論批評(언론비평)이 無(무)하얏스니 이 엇지 怪異(괴이)한 일이라 謂(위)치 안이하리오. 勿論(물론) 朝鮮人(조선인)은 舌(설)이 無(무)하고 手(수)가 無(무)한 바도 안이엿스며 思想(사상)이 업고 感想(감상)이 업섯든 바가 안이지만은 時勢(시세)가 不許(불허)하고 外國(외국)의 事情(사정)이 不許(불허)하엿든 까닭이로다.

然(연)이나 幸(행)인지 不幸(불행)인지는 알 수 업거니와, 昨年(작년) 三月(삼월) 騷擾(소요) 以來(이래)로 死人(사인)과 갓치 寂寞(적막)하던 日本(일본)과 朝鮮(조선)問題(문제)에 對(대)하야 日本(일본)의 輿論(여론)이 沸騰(비등)되야 或(혹)은 自治(자치)를 與(여)함이 可(가)하다 하며, 或(혹)은 同化(동화)가 否(부)하다 하며, 或(혹)은 武斷政治(무단정치)의 全廢(전폐)를 絶叫(절규)하며, 或(혹)은 統治(통치)方針(방침)의 革新(혁신)를 주장하야 其(기) 輿論(여론)이 一時(일시)는 甚(심)히 沸騰(비등)하엿스나, 然(연)이나 其(기) 當時(당시) 아직 우리 朝鮮(조선)에는 報道(보도)의 機關(기관)이 無(무)하엿슴으로 日本(일본)의 新聞(신문)雜誌(잡지)를 購讀(구독)하는 少數(소수) 人士(인사)를 除(제)한 外(외)에는 此(차)에 對(대)하야 不知(부지)하는 者(자)이 多數(다수)할 지도 不知(부지)하겟도다.

故(고)로 往事(왕사)임을 不顧(불고)하고 日本(일본)의 輿論(여론)으로 認定(인정)할 만한 者(자)와 또는 具體的(구체적)이며 代表論(대표론)이 될 만(新聞雜誌·신문잡지에 發表·발표된 中·중)한 三四(삼사)의 論文(논문)에 對(대)하야 此論(차론)을 試(시)코져 하노라. 兩(양) 民族(민족)의 問題(문제)가 분규하고 關係(관계)가 險惡(험악)한 新時(신시)를 當(당)하야 日本(일본)의 與論(여론)을 探究(탐구)함이 엇지 等閑(등한)한 일이라 하며, 緊切(긴절)치 아니한 일이라 하리오. 幸須(행수) 讀者(독자)는 必讀(필독)함을 懇請(간청)하는 바이로다.


一(일), 末廣(말광)博士(박사)의 朝鮮自治論(조선자치론)에 對(대)하야

本(본) 論文(논문)은 太陽(태양)(月刊雜誌·월간잡지) 昨年(작년) 七月號(칠월호)에 揭載(게재)되엿든 바인대, 太陽(태양)은 日本雜誌(일본잡지) 中(중) 政治評論(정치평론) 雜誌(잡지)로 第一(제일)의 名(명)이 有(유)하며, 論者(논자)되는 末廣重雄(말광중웅) 氏(씨)는 法學博士(법학박사)의 學位(학위)를 有(유)하며, 京都帝國大學(경도제국대학) 法科大學(법과대학) 敎授(교수)인대, 時事評論家(시사평론가)로 著名(저명)한 學者(학자)이로다.

氏(씨)는 本(본) 論文(논문) 劈頭(벽두)에 氏(씨)가 日韓(일한)의 倂合(병합)이 成立(성립)되든 當時(당시), 日本(일본)이 朝鮮(조선)統治(통치)의 道(도)를 誤愆(오건)할진대, 不遠(불원)하야 第二(제이)의 愛蘭(애란) 問題(문제)가 極東(극동)에서 發生(발생)되리라고 豫言(예언)하엿든 事(사)가 有(유)하엿드니, 不幸(불행)히 此(차) 豫言(예언)이 的中(적중)하엿다고 歎聲(탄성)을 洩(설)하엿스며, 朝鮮獨立(조선독립)의 騷動(소동)이 一時(일시)는 武力(무력)으로써 鎭壓(진압)할지라도 永遠(영원)히는 鎭靜(진정)치 아니할 지니, 朝鮮(조선)은 活火山(활화산)과 如(여)하다 말하고 朝鮮(조선) 問題(문제)는 日本(일본) 國運(국운) 消長(소장)에 重大(중대)한 關係(관계)가 有(유)한 즉, 當世(당세) 有志者(유지자)는 一日(일일)이라도 其(기) 硏究(연구)를 等閒(등한)이 함이 不可(불가)함을 力說(역설)하고 本論(본론)에 入(입)하엿는대, 記者(기자)는 便利上(편리상) 其(기) 重要(중요)한 論點(논점)만 原文(원문)대로 譯出(역출)하고 記者(기자)의 批評(비평)을 試(시)코저 하노라.


一(일), 統治(통치)反對(반대)의 原因(원인)

氏(씨)는 朝鮮人(조선인)이 日本(일본) 統治(통치)에 對(대)하야 反抗(반항)하는 理由(이유)와 原因(원인)에 就(취)하야 論(논)하엿스되


爲先(위선) 第一(제일)에 생각지 아니면 아니될 일은 엇지하야 朝鮮人(조선인)은 日本人(일본인) 統治(통치)에 對(대)하야 不平(불평)이 업지 못한가 함이라. 今次(금차) 朝鮮(조선) 騷動(소동)에는 元來(원래) 種種(종종)의 原因(원인)이 潛在(잠재)할지니 或(혹)은 朝鮮(조선)에 在住(재주)하는 米國(미국) 宣敎師(선교사)가 朝鮮人(조선인)을 煽動(선동) 使嗾(사주)하엿다 云(운)하는 者(자) 有(유)하도다.


論(논)하고 米國(미국) 宣敎師(선교사) 中(중)에는 朝鮮人(조선인)을 煽動(선동) 使嗾(사주)하는 者(자)가 有(유)하다는 例(예)와 或(혹)은 天道敎主(천도교주) 孫秉熙(손병희)의 陰謀(음모)에서 發生(발생)하엿다 指稱(지칭)하는 者(자)가 有(유)하나 然(연)이나 此(차)는 모다 重大(중대)한 原因(원인)으로는 認定(인정)할 수 업다는 斷案(단안)을 下(하)한 후 更論(갱론)하야 曰(왈),


朝鮮(조선) 騷動(소동)의 根本(근본) 原因(원인)은 此等(차등) 以外(이외)에 有(유)한대 其(기) 一(일)은 日本(일본)統治(통치)가 其(기) 道(도)를 失(실)한 所以(소이)라. 然(연)이나 朝鮮(조선)統治(통치)가 全然(전연)히 其(기) 道(도)를 失(실)하엿다 함은 아니라. 勿論(물론) 倂合(병합) 以來(이래) 日本(일본)의 朝鮮(조선)統治(통치)는 一面(일면)으로는 頗(파)히 良好(양호)한 成績(성적)을 擧(거)하엿도다. 從來(종래)로부터 腐敗(부패)하엿든 司法(사법)과 行政(행정)은 大部分(대부분) 刷新(쇄신)되여스며 敎育機關(교육기관)은 充實(충실)되고 交通機關(교통기관)은 改善(개선)되엿스며 衛生(위생)도 普及(보급)되고 農商工業(농상공업)도 漸次(점차) 發達(발달)하는 터이로다. 換言(환언)하면 朝鮮(조선)은 日本(일본)統治(통치)에 依(의)하야 玆今(자금) 十年間(십년간)에 偉大(위대)한 進步(진보)를 遂(수)하엿도다.


論(논)하고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植林(식림) 奬勵(장려)에 依(의)하야 山色(산색)이 一變(일변)하엿다는 例(예)를 擧(거)한 後(후) 論(론)을 更進(갱진)하여 曰(왈),


朝鮮人(조선인)은 然則(연즉) 日本(일본)의 統治(통치)에 信賴悅服(신뢰열복)할 지며 其(기) 惠澤(혜택)을 謳歌(구가)함이 可(가)할지어늘 엇지하야 朝鮮人(조선인)은 不平(불평)을 懷(회)하며 今次(금차)의 騷動(소동)을 惹起(야기)하엿는가. 記憶(기억)하라 日本(일본) 國民(국민)은. 朝鮮人(조선인)은 軍人(군인)의 支配(지배) 下(하)에 잇다는 것을.

朝鮮人(조선인)은 現代(현대)의 政治(정치)가 何者(하자)인지도 不知(부지)하고 天下(천하)는 일으로써 治(치)하리라고 생각하고 잇는 軍人(군인)의 支配(지배) 下(하)에 吟呻(음신)하는 도다. 此(차)는 實(실)로 過甚(과심)한 時代錯誤(시대착오)이지만은 日本(일본)에서는 軍閥(군벌)이 아직도 勢力(세력)이 有(유)함으로 今日(금일)까지 이가튼 일이 容納(용납)되는 도다.

軍人(군인)總督(총독) 下(하)에 朝鮮人(조선인)은 參政權(참정권)을 所持(소지)치 못하엿슴은 勿論(물론)이고 言語(언어) 著作(저작), 印行(인행), 集會(집회), 結社(결사)의 自由(자유)를 全部(전부) 剝奪(박탈)하엿도다. 또 그뿐 아니라 其他(기타)의 自由(자유)도 甚(심)한 制限(제한)을 밧고 잇도다. 然(연)이나 元來(원래) 人類(인류)의 要求(요구)는 一(일)을 得(득)하면 二(이), 二(이)를 得(득)하면 三(삼)을 取(취)코자 하나니 要求(요구) □□□□□□□ 決定(결정)이 업는 □□□□□□□으로 進步(진보)될사록 精神(정신) □□□도 要求(요구)함은 人類(인류)의 通有性(통유성)이라.

朝鮮人(조선인)은 十年(십년) 以來(이래) 日本(일본)統治(통치) 下(하)에서 多大(다대)한 物質的(물질적) 進步(진보)를 得(득)하야옴으로 今(금)에 更進(갱진)하야 精神的(정신적) 自由(자유)를 要求(요구)케 되엿로다. 然(연)이나 朝鮮人(조선인)은 自由(자유)를 要求(요구)하야 自由(자유)를 得(득)하엿는가. 日本(일본)國民(국민)은 思之又憶(사지우억)하라. 朝鮮人(조선인)에게 何等(하등)의 自由(자유)가 有(유)한가. 朝鮮人(조선인)은 果然(과연) 아모 自由(자유)도 가지지 못하엿도다. 朝鮮人(조선인)이 엇지 不平(불평)이 업슴을 엇으리요.


하고 朝鮮(조선)에 在住(재주)하는 日本人(일본인)이 朝鮮人(조선인)을 劣等民族(열등민족)으로 待遇(대우)하는 態度(태도)를 論(논)하야 此(차)를 非難(비난) 攻擊(공격)하고 日本人(일본인)이 白人(백인)에게 對(대)하야 人種差別的(인종차별적) 待遇(대우) 撤廢(철폐)를 高唱(고창)할 資格(자격)이 無(무)함을 痛罵(통매)하엿더라.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 (1) - 추송

서언

회고하건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 이미 십여 년에 이르려 하는구나. 뜻이 있는 사람이면 어찌 세월이 쏜살같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지 않겠는가. 일본과 한국의 병합은 조선민족에 대해서도, 일본민족에 대해서도 전무한 일이었다. 그 뿐 아니라 그 관계는 조선민족에게도, 일본민족에게도 극히 막중하고 더할 수 없이 큰일이며, 동양평화에도 중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 관계가 제일 중대하고 매우 절실한 자는 조선민족이다. 일본과 한국의 병합은 일본민족에게는 국운의 성쇠에 관한 문제에 그치지만, 조선민족에 대해선 민족의 존망에 관한 문제이다. 바꿔 말하면 일본민족에 대해서는 발전에 관한 문제이지만, 조선민족에게는 존폐가 걸린 문제다. 이와 같이 일본, 조선을 막론하고 유사 이래 일찍이 없었던 큰일이며, 두 민족에 대해 △그 운명의 성쇠에 관해 지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으며 △그 존폐에 대해 지극히 막중한 관계가 있는 두 나라의 병합에 대해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을 가리지 않고 병합이 이뤄진 지 10년에 이르도록 그 이해관계와 득실 여하, 운명 여하에 대해 한 줄의 비평도, 한 마디 언론비평도 일절 없었으니 이 어찌 괴이한 일이라고 할 수 없겠는가. 물론 조선 사람은 혀도, 손도 없는 것도 아니었고, 사상도, 감상도 없던 게 아니었지만 시대의 형세와 외국의 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작년의 3·1운동 이래로 죽은 사람 같이 적막하던 일본과 조선 문제에 대해 일본의 여론이 활발히 일어나 더러는 자치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더러는 동화는 옳지 않다고 하며, 더러는 무단정치의 종식을 부르짖으며, 더러는 통치 방침의 혁신을 주장하는 등 여론이 한때 크게 비등했다. 하지만 그 당시 아직 우리 조선에는 보도기관이 없었으므로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일 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이미 지난 일이지만 일본의 여론으로 인정할 만한 것이나 신문·잡지에 발표된 것 가운데 구체적이고 대표적이라 할 만한 논문 3, 4개에 대해 이 논의를 해보고자 한다. 두 민족의 문제가 어지럽고 관계가 험악한 때를 맞아 일본의 여론을 탐구하는 것이 어찌 소홀하다 하겠으며, 꼭 필요하고 절실한 일이 아니라 할까. 바라건대 독자 여러분은 이 글을 반드시 읽기를 간청한다.


1. 스에히로 박사의 조선자치론에 대해

이 논문은 월간잡지 ‘태양’ 작년 7월호에 게재됐는데 ‘태양’은 일본 잡지 중 정치평론 분야에서 제일 이름이 있으며, 논자인 스에히로 시게오 씨는 일본 교토제국대학 법과대학 교수인 법학박사인데, 시사평론가로 저명한 학자이다.

그는 이 논문 머리에 그가 일본과 한국의 병합이 이뤄지던 당시 일본이 조선 통치의 도(道)를 그르친다면 머지않아 제2의 아일랜드 문제가 극동에서 일어날 거라고 예언했었는데 불행히도 이 예언이 적중했다고 탄식했으며, 조선독립 ‘소동’이 일시적으로는 무력 진압할 수 있을지라도 영원히는 진정되지 않을 것이니 조선은 활화산과 같다고 비유했다. 이어 조선 문제는 일본 국운의 성쇠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만큼 이 시대 뜻있는 자는 하루라도 그 연구를 등한히 하면 안 된다고 역설하고 본론에 들어갔는데, 기자는 편의상 중요한 논점만 원문대로 번역하고 기자의 비평을 펴고자 한다.


1. 통치 반대의 원인

스에히로 박사는 조선인이 일본 통치에 대해 반항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우선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어찌해서 조선인은 일본인 통치에 대해 불평이 있는가 함이다. 이번 조선 소동에는 여러 원인이 잠재해 있으니 조선에 거주하는 미국 선교사가 조선인을 선동·사주했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는 이어 미국 선교사 중에 조선인을 선동·사주하는 자가 있다는 예와 천도교주 손병희의 음모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나 이는 모두 중대한 원인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 뒤 다시

‘조선 소동의 근본 원인은 이 밖의 것에 있는데 그 하나는 일본 통치가 그 도(道)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통치가 온전히 그 도를 잃었다 함은 아니다. 물론 병합 이래 일본의 조선 통치는 일면으로는 매우 양호한 성적을 거뒀다. 예로부터 부패한 사법과 행정은 대부분 쇄신됐으며, 교육기관은 확충됐고, 교통기관은 개선됐으며, 위생도 보급되고, 농·상·공업도 점차 발달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조선은 일본 통치에 의해 지금 10년 동안에 위대한 진보를 이뤘다.’

라고 논하고 조선총독부의 나무심기 장려에 따라 산의 색깔이 확 바뀌었다는 예를 든 뒤 다시 논하여 말하기를,

‘그러므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의 통치를 믿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것이며 그 혜택을 누림이 마땅한데 어찌 불평을 품고 이번 소동을 일으켰는가. 일본 국민은 기억하라. 조선인은 군인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조선인은 현대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천하는 칼로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군인의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다. 이는 실로 지나친 시대착오이지만 일본에서는 군벌세력이 아직도 있어서 오늘날까지 이 같은 일이 용납되는 게 사실이다. 군인 총독 하에 조선 사람은 참정권을 갖지 못함은 물론 언어, 저작,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모두 박탈당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자유도 심한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원래 인류의 요구는 하나를 얻으면 둘, 둘을 얻으면 셋을 갖고자 하는 법이니 □□□□□□□□□□ 진보할수록 정신적 □□□도 요구하는 것은 인류의 공통점이다. 조선인은 10년 이래 일본통치 아래서 눈부신 물질적 진보를 얻었으므로 오늘날 다시 정신적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은 자유를 요구해서 자유를 얻었는가. 일본 국민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조선인에게 조금이라도 자유가 있는가. 조선인은 정말로 아무런 자유도 갖지 못했다. 조선인이 어찌 불평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열등민족으로 대우하는 태도에 대해 이를 비난, 공격하고 일본인이 백인에 대해 인종차별적 대우를 철폐할 것을 높이 부르짖을 자격이 없음을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