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 자사고, 없앨 게 아니라 추첨으로 뽑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5일 15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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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재학 중 과외를 받아본 적도, 학원을 다닌 적도 없다. 학교 선생님을 믿고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선생님의 수업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한의대에 진학했고 지금은 공중보건의로 일한다. 우수한 친구들 사이에 있다 보면 기가 죽을 때도 있었지만 다양한 동아리를 통해 취미활동, 봉사, 토론, 실험 등 다양한 분야를 체험하며 자신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전주 상산고 졸업생이 모교 총동창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런 학교가 바로 우리가 원하는 학교 아닌가? 이렇게 훌륭한 교육을 왜 동네 일반고에선 받을 수 없단 말인가??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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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장한다. 자사고(자립형 사립고)는 없앨 것이 아니라 더 확대해야 한다고. 자사고도 공부 잘하는 학생만 뽑아 잘 가르친다고 자부할 것이 아니라 공부 못하는 아이들도 같은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추첨제’로 선발하라고!

입시 명문고·고교 서열화가 문제?

왜 자사고 같은 수월성(秀越性) 교육이 필요한지부터 쓰다보면 날 새고 만다. ‘세계적으로 사립학교(우리로 치면 자율성을 지닌 자사고를 말한다)가 붐이고, 정부는 억제할 게 아니라 축하해야 한다’는 4월 13일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특집도 소개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그런다고 좌파 평등주의에 사로잡힌 정부가 알아먹을 리 없다. 0.39점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상산고의 자사고 재지정을 취소한 김승환 전북교육감은 전북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커트라인을 80점으로 올린 이유로 ‘대통령 공약사항’을 꼽았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외국어고·자사고·국제고가 설립 취지에서 벗어나 입시 명문고가 돼버렸다”며 “이들 학교를 일반고로 전환해 고교 서열화를 완전히 해소하고 일반고 전성시대를 열겠다”고 밝힌 바 있다. 마침 올해가 5년마다 돌아오는 자사고 재지정 평가여서 자사고가 첫 매를 맞게 된 거다.

김승환은 자사고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상산고에 철퇴를 내림으로써 작렬하는 존재감으로 차기 교육부총리 자리를 예약했다. 2014~15년 자사고 재지정 철회 결론을 내렸다가 당시 교육부총리가 ‘부동의’하는 바람에 실패했던 조희연 교육감은 다음주 서울지역 발표를 앞두고 이를 갈고 있을 듯하다.

지난달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업무 보고를 하고 있는 김승환 전북교육감(가운데).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등도 참석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지난달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업무 보고를 하고 있는 김승환 전북교육감(가운데).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등도 참석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대통령 발언에서 드러난 자사고 폐지의 표면적 이유는 입시 명문고라는 것과 고교 서열화였다. 그럼 이 두 가지를 해소하면 될 게 아닌가?

우수학생만 모였으니 대학 잘 가지!

자사고가 입시 명문이 된 건 상산고 졸업생 편지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선생님, 스스로 공부하며 함께 성장하는 학생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교사도 잘 가르치겠지만 원체 우수한 학생들이 모였으니 일반고보다 좋은 대학 잘 가는 건 당연하다. 특히 상산고처럼 전국 단위로 선발하는 자사고에 입학하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피나는 사교육이 성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전주 상산고. 동아일보 DB
전주 상산고. 동아일보 DB

그래서 이들 전국 단위 자사고도 서울처럼 내신 제한 없이 추첨으로 뽑자는 거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은가? 서울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2014학년도까지 내신 상위 50% 이내 지원자를 대상으로 추첨 선발했지만 우수학생 선점한다는 바로 그 비판 때문에 2015학년도부터 1단계 추첨, 2단계 면접으로 바꿨다. 면접에선 교과 관련해선 질문도 못하게 해놨다.

서울 자사고에선 성적 안 본다

그 이후 서울 자사고의 질이 떨어졌을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작년 8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논문 ‘자율형 사립고의 교육성과와 과제에 관한 질적 연구:A자사고를 중심으로’(서울대 대학원 문하은 석사논문)를 보면 눈물이 날 정도다. 이렇게 좋은 학교에 왜 더 많은 아이들이 다닐 수 없는지 억울하다. 2009년 일반고에서 자사고로 전환했고, 2015학년도부터 성적 제한 없이 추천으로만 뽑는데도 여전히 훌륭한 교육을 하고 있었다.

“무작정 입시를 목표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과목들, 입시에 필요하지 않는 과목들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수업도 있고 (다른 일반학교는 어떤 과목을 만들어 놓고 입시와 관계없으면 자습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저희 학교는 실제로 영화도 만들고 춤도 추고 그랬어요.

서울시내 자립형 사립고 학생들이 악기 연주를 하는 모습. 동아일보 DB
서울시내 자립형 사립고 학생들이 악기 연주를 하는 모습. 동아일보 DB

자사고가 우수 학생을 선점하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면학 분위기로 말미암아 저를 포함한 공부를 안했던 아이들도 정신 차리고 공부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저도 자사고 가서 정신 차린 케이스거든요. 다들 목표도 높다 보니 저도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게 되고 더 열심히 하게 됐어요. 다들 열심히 하니까요.”(A자사고 졸업생)

못하는 학생도 끌어올려야 좋은 학교

그들은 자사고 진학 동기로 면학 분위기를 꼽았다. 자사고에 지원을 한다는 것은 ‘공부할 자세’가 돼 있다는 뜻이다. 설령 지금은 성적이 좋지 않아도 자세가 돼 있으면 사람은 성장한다. 또 공부 잘하는 학생만, 부모 잘 만나 비싼 사교육 받은 학생들만 자사고처럼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배 아픈 일이다. 그래서 성적 제한 없이 자사고 선택의 기회를 주자는 거다.

서울시내 자립형 사립고의 수업 모습. 동아일보 DB
서울시내 자립형 사립고의 수업 모습. 동아일보 DB

훌륭한 교육을 자부하는 자사고라면 최상위 학생들만 선발하겠다고 고집할 게 아니라고 본다. 원래 공부 잘하는 애들만 뽑아 서울대에 대거 보내는 건 (일반고 교사들이 보기엔 솔직히) 땅 짚고 헤엄치기다. 교육이란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키워주는 것이고, 진짜 잘 가르치는 학교라면 좀 뒤떨어지는 학생도 잘 하게 만들어야 한다. 70점짜리 학생을 받아 90점으로 키울 자신 없다면, 자사고 간판 내려도 할 수 없단 소리다.

최상위 학생들만 가득했던 자사고에 공부 좀 못하는 학생이 들어온다고 해서 우수 학생들이 손해 볼 것도 없다. 내신 바닥을 깔아줄 터이니 성적에 대한 부담은 외려 준다(^^). 또 이 나이 돼서 깨달은 것이지만, 공부만 잘하는 게 무에 그리 대단한가. 공부 못하는 친구 무시하지 않고, 어려운 친구 도와줄 줄도 아는 인재가 사회 전체로 봐도 훨씬 바람직하다.

미국서도 추첨 선발 주장이 나온다

추첨으로 엘리트학교 학생을 뽑는 것이 과연 공정하냐는 비판도 나올 것이다. 최상위 학생이라면 왜 내가 저 공부 못하는 애 때문에 떨어져야 하느냐고 억울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본다면, 최상위 학생은 어디서 공부해도 결국 원하는 대학 가게 돼 있다. 미국서 연구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미국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 동아일보 DB
미국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 동아일보 DB
세계 경제학계 스타였던 앨런 크루거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합격했지만 경제적 이유든, 무슨 사정으로 덜 좋은 대학에 진학했던 사람도 결국 아이비리그 출신 뺨치는 직장에서 성공하더라는 연구결과를 2002년 내놨다. 아이비리그 갈 만한 학생은 설사 못 가도 그 실력, 그 자세로 어디서든 잘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달튼 콘리 프린스턴대 사회학 교수 같은 사람은 “아이비리그 대학도 로터리(제비뽑기)로 선발하라”고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주장했다. 특히 학원에서 실력을 다진 아시아계 학생들 때문에 흑인과 라틴계 학생들이 엘리트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며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이런 식으로 자사고 없애면 죄받을 것

제비뽑기라는 게 거의 운(運)이다. 추첨으로 입시에서 떨어지면 기분 나쁘겠지만(실력으로 떨어지면 더 기분 나쁘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의 상당부분이 운인 것도 사실이다.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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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부모 아래 태어난 것도 ‘삼신할머니의 랜덤’이고, 좋은 머리나 건강을 가진 것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행운이라고 봐야 한다(그 똑똑한 앨런 크루거도 지난 3월 무슨 연유인지 58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ㅜㅜ).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운과, 시기와, 내가 모르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세상에 대해 겸허하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겸손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운 좋게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가 함부로 자사고를 폐지해선 안 될 이유도 여기 있다. 정부가 벽돌 한 장 사주지 않았으면서, 좌파 전교조에 휘둘려 일반고 전성시대는 열지도 못하면서, 제 자식들은 자사고 보냈지만 남들 잘 되는 꼴은 못 본다는 비뚤어진 이념으로 자사고를 없앤다면 필시 죄받고 말 것이다.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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