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인간에 대한 이해

  • 동아일보
  • 입력 2005년 1월 14일 18시 16분


노무현 대통령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엊그제 연두기자회견에서도 대통령은 만면에 엷은 웃음을 띤 채 말 한마디에도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올해는 싸울 일 별로 없을 것”이라던 대통령의 덕담을 떠올린 사람들은 안심해도 되겠다. 경제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다짐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진작 그러시지, 얄미운 애인 보듯 눈 흘기고 싶어진다.
자신의 변화에 대해 대통령은 “생각은 생각으로, 정책은 정책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국가보안법,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나온 얘기다. 맞는 말이다. 대통령이라고 의견이 없을 수 없지만 모든 의견을 정책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열린우리당과의 송년만찬에서 국보법을 차근차근 해결하자고 한것 등에 관해 “환경 때문에 덕담하고 필요에 의해서 표현이 약간씩 누그러지는 일은 있다”고 설명한 대목엔 의문이 생긴다. 쉽게 말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상대방 듣기 좋으라고, 또는 전략적으로 말을 달리 한다는 소리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이번 연두회견도 국민 듣기 좋으라고 한 덕담이 아니란 법도 없다.
▼公私 구분해야 도덕적이되…▼
악의적 해석인지 모른다. 내가 인간이 비뚤어졌고, 직업이 기자이고, 그것도 ‘비판 신문’에 몸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앞장설 동반성장의 경제정책은 물론, 대통령이 강조한 도덕성 관련 인사 기준을 보면 대통령은 ‘나(즉 정부)는 옳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느낌을 준다.
“도덕성이라고 하면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고 사심(私心) 없이 일을 해 줄 것이라는 점이 요구된다.”
사적 인연을 수없이 공적 자리에 앉혀 온 대통령이었다. 같은 학교 후배이자 독서실 총무로 알게 된 이를 대통령총무비서관으로 임명했다가 측근비리가 터져 욕도 봤다. 고위공직자 인사검증과 대통령 주변 비리감시가 주요 업무인 민정수석엔 고시공부를 같이 한 고향 후배를 뒀다가 ‘이기준 사태’를 낳았다. 인사 검증을 총괄하는 공직기강비서관도 부산상고 출신이다. 동문인사, 참모인사, 정실인사, 코드인사를 계속하는 것 말고도 보은(報恩)인사 또한 도를 넘는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사람은 공사 분명함이 도덕성의 기준이라고 말하기도 껄끄러울 수 있다. 그게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이론이다. 태도와 행동이 다르면 뭔가 불편하다는 거다. 그래서 대부분 태도를 바꾸거나 행동을 바꿔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지, 본인은 공사를 분명히 안 하면서 공사 구분이 중요하다고는 말 안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대통령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무한히 넓혀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먼저, 인지부조화를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역설과 모순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사 검증을 맡게 될 부패방지위원장에 언젠가 대통령의 또 다른 후배가 와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을 일이다.
또, 사람은 과히 이성적이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누구나 시종일관 자기 능력과 정직성과 도덕성 같은 걸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사회심리학적 정설이다. 자기기만(欺瞞)과 부패가 어디에나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크게 실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지 싶다.
▼걱정 없는 나라 만세!▼
이렇게 이해하기 시작하면 이런 대통령과 함께 사는 우리나라는 한결 좋은 나라가 될 게 분명하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가 가까워서만이 아니다. 저마다 약점과 아픈 점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행복의 나라가 따로 없다. 단지, 정부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업으로 하는 신문만 먹고 살기 힘들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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