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붙’ 글 도둑[횡설수설/김선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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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은 미국의 실존인물 프랭크 애버그네일(73)을 소재로 했다. 1960년대 미국 연방수사국(FBI) 지명수배자 명단에 오른 범죄자 중 최연소였던 그는 각종 전문직으로 위장하며 사기극을 펼쳤다.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비행기 조종사, 의사, 변호사로 변신했다.

▷국내 한 문학작품 도용 사건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달구고 있다. 김민정 씨가 그제 SNS에 2018년 백마문화상을 받은 자신의 단편소설 ‘뿌리’의 본문 전체가 무단 도용됐다는 글을 올린 것이다. 더구나 그가 도둑맞은 글은 지난해 5개의 문학 공모전에서 수상했다는 사실도 제보로 알게 됐다고 한다. 백마문화상은 명지대 대학신문이 여는 공모전으로, 그는 당시 서울대 학생 신분으로 지원했다.

▷이 글이 올라오자 SNS의 집단지성이 ‘글 도둑’ A 씨를 곧바로 색출해냈다. 그는 지난해 7월 김 씨의 ‘뿌리’를 베껴내 받은 포천38문학상 상패와 책 본문 사진도 페이스북 전체공개로 올려놨다. “난 작가도 소설가도 아닌데…”라는 설명과 함께. 특이한 점은 페이스북의 프로필이었다. 직장 소개가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2021 정책기자단 등 무려 25개였다. 혹시나 싶어 문체부에 확인하니 이 기자단은 지난해 말 모집 공고를 내고 이달 20일에나 선정자를 발표할 예정이란다.

▷A 씨와 통화해 보니 의외로 순순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누가 쓴지도 모르는 인터넷의 글을 그냥 공모전에 냈다고 한다. 금전적으로 쫓기다 보니 상금이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원작자인 김 씨는 A 씨가 남의 저작물을 페이스북에 전시함으로써 자신이 아닌 남의 인격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며 리플리 증후군(허구의 삶을 만들어놓고 사실인 양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어제 한 방송에 나와 말했다.

▷문학계는 문학의 순수성이 능멸당하는 일이 벌어졌다며 충격에 빠졌다. 문학에서는 단 한 줄의 독창적 표현만 훔쳐도 표절인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베끼는 걸 상상도 못 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마추어 공모전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심사위원들이 주요 작품 이외의 모든 글을 다 읽어 표절을 가려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술논문은 디지털 처리돼 있어 표절검사기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지만, 문학은 저작권 침해 소지가 없는 글만 공개하니 확인이 어렵다. 문학의 도용과 표절을 자동으로 잡아내려면 먼저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잡아야 하는 건 어쩌면 ‘프랭크’보다 훨씬 더 잡기 어려운 ‘복붙(복사해 붙이기)’ 시대의 글 도둑이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문학작품 도용#단편소설#뿌리#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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