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공장’ 방사광가속기… 신약-반도체 개발의 ‘씨앗’

김민수 동아사이언스 기자 입력 2020-04-13 03:00수정 2020-04-13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경북 포항시 포항가속기연구소 빔라인 장치. 포항가속기연구소 제공
2009년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신종 플루)는 전 세계 214개국에서 수백만 명을 감염시키고 1만8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국내에서도 확진 환자가 75만 명 발생해 이 가운데 263명이 숨졌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보다 감염자가 훨씬 많지만 더 큰 피해 없이 진정됐던 이유는 ‘타미플루’라는 치료제가 개발된 덕분이다. 미국 스탠퍼드대가 운영하는 방사광가속기(SSRL)는 타미플루 개발의 숨은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해 물체를 꿰뚫는 엑스선 빛을 만드는 장치다. 이 빛을 활용해 바이러스 단백질 결합 구조가 밝혀지면서 곧바로 치료제 개발로 이어졌다.

최근 국내에서도 첨단 과학연구 장치인 방사광가속기 신규 구축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경북 포항에 설치된 3세대 방사광가속기와 4세대 방사광가속기만으로는 수요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신규 ‘다목적 방사광가속기’를 유치하려는 지방자치단체 간의 경쟁과 4·15총선이 맞물리면서 유치전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산업 판도 좌우하는 ‘빛 공장’ 방사광가속기



방사광가속기에서 가속돼 나온 극자외선, X선과 같은 빛을 이용하면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단백질 구조, 세포분열 과정은 물론이고 나노 소재 물성 변화까지 직접 볼 수 있다.

주요기사

방사광가속기에서 나온 연구 성과는 실제로 산업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일본이 수출 규제 품목으로 지정한 반도체 관련 소재인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일본은 방사광가속기에서 나온 EUV로 포토레지스트의 성능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면서 세계적인 기술 경쟁력을 확보했다. 타미플루와 함께 제약산업 게임 체인저로 떠올랐던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도 방사광을 이용한 단백질 구조 분석 덕분에 가능했다.

포항 방사광가속기는 1995년 세계에서 5번째로 준공됐다가 2011년 업그레이드를 통해 3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로 거듭나면서 국내 산업계와 과학계 연구를 지원해왔다. 3세대 방사광가속기에서는 태양광의 100억 배에 이르는 빛을 만든다. 이 빛으로 100억분의 1초 단위로 물질 구조 변화 분석이 가능하다. 흔히 병원에서 사용되는 X선은 가시광선이 통과하지 못하는 피부나 근육을 투과해 뼈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방사광가속기에서 나오는 X선으로는 심장근육의 움직임과 진동까지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준공된 4세대 선형 방사광가속기가 만드는 빛은 3세대 방사광가속기에서 나오는 빛보다 1억 배 더 밝다. 연구자가 원하는 파장의 강한 빛을 1개만 생성할 수 있어 찰나의 시간에 물질의 구조가 어떻게 바뀌는지 보는 데 활용된다.

3세대 방사광가속기에는 빛을 내는 장치인 빔 라인이 35개 구축돼 있다. 35개의 실험을 한꺼번에 진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의 빔 라인은 1개로 실험장치 3개를 끝단에 붙여 한번에 3개의 실험이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 산업계에서 방사광가속기 수요가 늘면서 점점 공급이 부족해지고 있다. 방사광가속기를 써야 하는 연구 과제에 배정되는 시간은 실제 필요한 시간의 절반인 53%에 불과하다. 고인수 포항가속기연구소장(포스텍 물리학과 명예교수)은 “1년에 두 차례 빔 라인 사용 신청을 받는데 원하는 빔 라인을 쓰기 위한 경쟁률이 2 대 1”이라며 “대부분 기업이나 연구원들이 보통 반년 정도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해외 방사광가속기를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총선 앞두고 4개 지자체 유치 각축전

정부는 지난달 24일 약 1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 방사광가속기를 신규로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구축되는 방사광가속기는 4세대 원형 가속기다. 포항에 있는 4세대 선형 가속기와 구분하기 위해 ‘다목적 방사광가속기’로 부르고 있다.

새 방사광가속기를 유치하려는 지자체 간의 유치 경쟁도 본격화했다. 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강원 춘천, 경북 포항, 전남 나주, 충북 청주 등 4개 지자체가 유치의향서를 제출했다. 이달 안에 지질조사 보고서와 유치계획서를 받고 이르면 다음 달 초 부지 선정평가위원회 평가가 진행된다.

아직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일부 지자체에선 벌써부터 평가 기준이 불공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접근성에 대한 평가 요소가 과다하게 높게 책정됐다는 점이 가장 큰 불만 사항이다. 과기부는 “가속기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단단한 지반을 가진 입지 환경이지만 교통 접근성도 중요한 평가 사항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과기부는 그 근거로 2020년 3월 광주시가 수행한 방사광가속기 활용성 제고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수요자인 기업과 연구자들이 가속기 성능 외 항목에서 빔 라인 이용시간 배정과 운영인력에 이어 교통 접근성을 세 번째로 중요한 애로사항으로 꼽았다고 제시했다.

총선 정국에서 지역구 후보자들의 공약 남발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남 지역에 가속기 유치를 약속했다가 다른 경쟁 후보지역의 반발로 철회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주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대형연구시설기획연구단장은 “신형 가속기 건설을 위해서는 퇴적층이 없고 지반이 단단한 입지 조건과 연구자들의 애로사항인 접근성 등 상식적인 기준이 고루 반영돼야 한다”며 “대규모 과학연구시설 건설에 정치 논리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민수 동아사이언스 기자 reborn@donga.com
#방사광가속기#반도체#신약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