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드라마를 만들고, 드라마는 현실을 만든다[이승재의 무비홀릭]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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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와 절묘하게 포개지는 드라마 ‘킹덤’ 시즌2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코로나19 사태와 절묘하게 포개지는 드라마 ‘킹덤’ 시즌2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요즘엔 개봉하는 영화도 별로 없어 극장이 한산해요. 교회 집단예배를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권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다큐멘터리 영화 ‘교회오빠’의 3월 재개봉 계획도 코로나19로 취소됐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구석 1열에서 TV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늘었는데요. 저를 화들짝 놀라게 만든 인기 드라마가 두 편 있었어요. 안 궁금하시겠지만 저는 그냥 말해 볼래요.

우선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에요. 지난해 시즌1로 시작해 최근 시즌2로 이어진 이 조선시대 좀비물은 어쩌면 코로나19 사태와 이토록 뜨악하게 포개어지는지 말이에요. 생사초(生死草)란 해괴한 풀의 즙을 침(鍼) 끄트머리에 찍어 방금 죽은 사람에게 주입하면 1세대 좀비가 탄생하는데요. 이 좀비가 사람을 앙 물면, 물린 사람은 좀비가 안 되고 그냥 죽어요. 근데 이렇게 죽은 자의 육신을 먹은 사람들이 2세대 좀비가 되고, 이때부턴 물리면 바로 좀비로 변해 점점 역병처럼 퍼지는 지옥도가 펼쳐져요. 좀비 역병이 경상도 지역에서 처음 창궐하자 실권을 장악한 해원 조씨 가문의 수장이자 영의정인 조학주(류승룡)는 자신에게 반대해 왕권을 바로 세우려는 영남 지역의 정신적 지주 안현 대감(허준호)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상주성 문을 걸어 잠그고 경상도 봉쇄에 들어간다는 얘기예요.

와우! 1차, 2차 감염에다 지역사회 3차 감염이란 설정까지 있는 거죠. 게다가 좀비를 만들어내는 원흉인 생사초가 어디에서 들어온 풀인지 아세요? 중국이에요. 더욱 놀라운 것은 좀비의 활동성이 낮밤이 아닌 기온에 따라 달라진단 사실이에요. 저온에선 극성을 부리고 고온이 되면 잠잠해지지요. 기절초풍할 선견지명이지요? 정치인들은 백성의 안위엔 관심도 없고 역병을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한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 거덜 난 나라를 바로 세우고 온갖 뒤치다꺼리 다하는 건 결국 좀비처럼 미친 듯이 세금만 내온 죄 없는 백성들이란 점이 작금의 시국과 정말 유사하다고 매사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말하지만, 순진한 저는 잘 모르겠어요. 독창적이진 않지만 서양 소재인 좀비를 가져와 로컬라이징(localizing)에 성공한 킹덤을 두고 ‘케이 좀비’라는 극찬까지 나오던데, 이런 추세라면 ‘케이 소주성(소득주도성장)’, ‘케이 비례위성정당’도 기대해 볼게요.

킹덤에 이어 또 제가 놀란 드라마는 얼마 전 막을 내린 ‘이태원 클라쓰’예요. 웹툰이 원작인 이 드라마는 아버지를 잃고 소액자본으로 실내포장마차를 연 청년 박새로이(박서준)가 원칙과 소신을 통해 크게 성공해 아버지 원수인 장대희(유재명)가 이끄는 요식업 1위 업체 ‘장가’에 대한 인수합병에 성공한다는 현실성 없는 스토리예요. 근데 박새로이의 헤어스타일이 요즘 청년들 사이에 큰 인기예요. 이 머리는 앞머리를 아주 짧게 일자로 잘라 ‘밤톨머리’라고도 불리는데요. 여간 잘생기지 않고는 바보 멍청이처럼 보이기 십상인 이 머리를 왜 젊은이들이 추종하는지 아세요? 박새로이의 우직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 멋져 보여서? 아니에요. 사실은 박새로이가 수컷들의 불온한 판타지를 자극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게 무슨 좀비가 야채김밥 씹어 먹는 소리냐고요? 생각해 보세요. 박새로이는 “제 삶의 주체가 저인 게 당연한, 소신의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같은 있어 보이는 대사를 던지는 것 외엔 경영자로선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요. 오히려 무능할 만큼 현실 인식이 떨어지고 트렌드에 무감각하죠. 박새로이를 성공시키는 건 조이서(김다미)예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박새로이의 모습에 한눈에 반한 그녀는 최고 대학 입학도 포기한 채 박새로이 밑으로 들어가 놀라운 사업 수완으로 일개 포차를 거대 기업으로 일궈냅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일생에 단 하나. 짝사랑하는 박새로이 사장님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이랍니다! 그녀가 영혼을 끌어모아 일하는 이유도 단 하나. 박새로이 사장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대표님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와우! 이렇게 젊고 유능하고 예쁘고 귀엽고 진취적인 여성이, 자기에겐 관심도 없고 돈도 없고 생긴 것도 돌쇠 같은 열 살 많은 남자에게 “사장님 꿈, 제가 이뤄드릴게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장님, 사랑한다고요”라며 죽어라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사랑받으려 안달이 난 모습이 요즘 청년들에겐 얼마나 환상적으로 다가왔겠느냔 말이지요. 냉정하게 제가 분석해 보면 조이서는 박새로이를 진짜로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한번 내 사람이 되면 끝까지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박새로이의 조폭적 신념에 ‘가스라이팅’된 상태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요. 조이서는 박새로이라는 ‘유사종교’의 광신도인 셈이란 말이에요.

노력도 안 하면서 여자의 사랑을 받으려는 남자의 공짜 심리는 지구촌에서 배척돼야 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노래가 김건모의 ‘미안해요’예요. 남자가 “그 흔한 옷 한 벌 못해주고” “따듯한 밥 한 번 못 사준다”며 기껏 노래로 때우려 들잖아요? 2AM의 ‘이 노래’도 싫어해요. “줄 수 있는 게 이 노래와 목소리밖에 없다”니요? 사랑한다면 노래할 시간에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요. 여성 여러분, 기억해 두세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는 “미안해”라면서 실제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랍니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킹덤#이태원 클라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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