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순종하며 일하는 봄날[포도나무 아래서]〈49〉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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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보온병에 따뜻한 차 좀 가져가고 싶은데 모과차가 어디에 있지?” 바깥은 아직 어두운데 레돔이 나를 깨운다. 단꿈에 젖어 있던 나는 겨우 이불 속에서 나와 보니 그는 벌써 아침을 다 먹었다. 아침이라고 해봐야 마른 빵 두 조각과 커피, 사과 콩포트(과일을 설탕에 졸인 디저트)가 전부다. 키가 저렇게 큰데 아침이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좀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것 아닐까?

“계란이라도 삶아 줄까?” 그는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내일 비 소식이 있어. 과일 나무를 심기에 딱 좋은 날이야. 오늘을 놓치면 안 돼.” 늦잠을 좋아하는 남자지만 봄이 되면서 아침마다 스스로를 재촉한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멀거니 그를 본다. 이 남자가 내 남편인가, 참 낯설다. “머리카락 좀 봐.” 흰머리가 점점 늘어가는 엉긴 곱슬머리를 보니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외모가 엉망이다. 볼과 손등은 나무에 긁히고 찔린 생채기로 덮여 있고 손가락에는 밴드가 붙어 있다. 걸친 옷은 낡은 데다 흙먼지로 꼬질꼬질하다. 전체적으로 멋이라곤 없다.

“당신은 충주시 수안보에 유일한 프랑스 남자야. 그러니까 외모에 신경 좀 써야 해. 그런 꼴로 나가다니, 프랑스에 대한 환상이 다 깨지겠다 정말.” 나의 한마디에 그는 불같이 화를 낸다. “농사지으러 밭에 가는 놈이 양복 빼입고 갈까!”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린다. 아니, 그게 그렇게 화낼 만한 소리였나. 프랑스 남자도 갱년기가 있나 보다. 창문 너머로 내다보니 트럭에 시동을 걸고 번개처럼 사라져버린다. 모자와 목도리도 안 가지고 그냥 가버렸다. 트럭이 떠난 빈자리를 보니 나도 화가 올라온다. 마음 같아서는 내 차를 타고 반대편으로 멀리 달려서 며칠 후 돌아오고 싶지만, 참을 인 자를 새기며 말린 모과를 꺼내 주전자에 담는다.

끓인 차를 보온병에 넣고 과일과 비스킷도 챙긴다. 저 프랑스 남자는 그래도 여자 하나는 잘 만났다고들 말할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밭으로 향하니 바깥은 봄이다. 서울로 흘러가는 남강은 봄볕을 받아 반짝거리며 산줄기를 감싸고 흐른다. 풍경은 아름다운데 기분은 별로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농사짓고 술 만드는 남편 때문에 덩달아 바빠진 내 인생에 불만스럽다.

밭에 가니 레돔이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밭둑에는 동네 할머니 두 분이 뭔가를 캐며 두런두런 이야기 중이고 이웃 사과밭에서는 어르신이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저 아래 복숭아밭에서 귀농 후배가 가지치기를 하다가 손을 흔든다. 다들 계절에 순종하며 일하는 모습에 왠지 미안해진다. “나 혼자 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왔어.” 레돔이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며 손으로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는다. 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느라 아침에 화냈던 건 다 잊어버린 것 같다. 눈이 반짝거리고 생기가 넘친다. 휘파람이라도 불 것 같은 얼굴이다. 그는 널찍한 검은 바위 위에 앉아 멀리 바라본다. 먼 산이 있고 가까운 산이 있다. 먼 산에는 산신령이 살 것만 같다. 가까운 산에는 유쾌한 정령들이 날아다닐 것 같다.

“여긴 북쪽에서 바람이 많이 불어. 은사시나무를 세 그루씩 심어서 바람을 막고 저 아래 물이 고이는 곳엔 버드나무를 심어야지. 버드나무는 나중에 소쿠리도 만들 수 있어. 이쪽 돌무더기엔 무화과나무, 저쪽 포도밭 중심엔 복숭아나무, 그 아래는 나무딸기를 심을 거야. 어때, 이렇게 하면 모든 나무들이 서로 잘 어울리는 숲과 같은 밭이 될 거야. 상상이 가?”

늙은 여자가 숲과 같은 과일 밭을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새들이 와서 아침잠을 깨우고 비 오는 날에는 운무가 가득할 것이다. 그런 날에는 산신령과 정령들이 이곳까지 날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 인간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행복해질 수가 있구나! 이곳에 밭을 일구고 집과 양조장을 지어 살게 될 때 나는 매일 아침 먼 산에 한 번, 가까운 산에 한 번, 절을 할 것이다. 그 산들은 이 마을과 사람들을 지켜줄 것이다. 작은 벌레처럼 폭신한 땅에 묻혀 농부의 발소리에 잠을 깨고 산과 들이 주는 즐거움을 조용히 누리고 살아갈 날이 빨리 왔으면 싶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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