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 붉은 동백… 그리운 이 생각나네, 장흥의 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긴 겨울을 뚫고 새싹처럼 솟아나는 봄은 희망이다. 어느 때보다 어지러운 겨울을 보낸 올해는 계절도 빨리 희망을 전해주고 싶었나 보다. 남쪽에 서둘러 봄이 찾아왔다. 서울의 정남쪽이어서 정남진이라고도 불리는 전남 장흥에는 벌써 봄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겨울의 긴 터널도 끝이 보인다.


일찍 고개 내민 빨간 동백꽃

전남 장흥에는 기암괴석이 많은 천관산(해발 723m)이 유명하다. 많은 사람이 천관산에 올라 감탄을 쏟아낸다. 하지만 북측 자락 뒷산에 국내 최대의 동백숲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곳의 장관을 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한다.

천관산자연휴양림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오르면 푸른 잎으로 둘러싸인 골짜기가 나온다. 골짜기를 뒤덮은 나무는 대부분 동백나무다. 말 그대로 동백숲이다. 천관산 동백숲은 2007년 국내 최대 동백 군락지로 인증받았다. 10여 명이 열 달을 매달려 3만 그루 정도까지 세다 “그만하면 됐다”라는 통보를 받고서야 작업을 그쳤다고 한다. 아직도 정확한 개체수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국내 최대임에는 틀림없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규모가 컸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대대로 동백나무로 숯을 만들었다. 넓은 동백숲엔 지금도 7개의 숯가마 터가 남아 있다. 주민들이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동백나무 가지를 밟고 걸어 다닐 정도라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숲이 많이 훼손됐다고 한다. 현재 동백숲에 남아 있는 동백나무의 수령이 60∼80년 정도인 것도 그 때문이다. 가끔 수령이 250년 이상 된 나무가 발견되곤 한다.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잘리는 것을 면한 운 좋은 나무다.

해가 쨍한 맑은 날에는 동백나무의 푸른 잎에 반사된 햇살에 눈을 뜨기 힘들다. 동백기름을 바른 듯 햇살에 반짝이는 잎을 보면 어디가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조차 쉽지 않다. 동백나무 아래 산책로에 들어서면 울창한 나뭇잎 때문에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원시림 같은 분위기는 산책로 밖에서 봤던 동백숲이 맞나 싶을 정도다.

보통 천관산 동백숲은 4월 초순이 절정이다. 하지만 올해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일찍 피기 시작했다. 3월 중순부터는 붉은 동백꽃 장관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장흥에서는 또 다른 느낌의 동백숲을 만날 수 있다. 장흥군 묵촌리는 동백숲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약 2000m² 부지에 14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진 찍기 좋은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이곳 나무의 수령은 200∼300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많은 동백꽃이 피었다. 3월 이곳에는 동백 꽃비가 내린다. 숲 바로 옆은 초록빛이 생생한 보리밭이어서 새빨간 동백이 더욱 돋보인다.

순국 110주년 맞는 안중근 의사 사당
해동사 안중근 의사 사당. 아래 사진은 묵촌리의 동백숲.
해동사 안중근 의사 사당. 아래 사진은 묵촌리의 동백숲.

장동면 만수리에 자리한 해동사는 특별한 곳이다.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매년 추모 제향을 지내는 국내 유일의 사당이기 때문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안 의사의 사당이 장흥에 있는 것은 의외다. 안 의사와 연고가 없는 장흥에 사당이 세워진 것은 죽산 안씨 문중의 노고가 컸다. 이들은 본관이 다른 순흥 안씨인 안 의사 후손이 국내에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안홍천 씨가 1955년 문중과 함께 사재를 털어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올해는 안 의사의 순국 110주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죽산 안씨 시제를 지내는 음력 3월 12일에 안 의사의 제향이 열렸다. 올해부터 안 의사가 순국한 날인 3월 26일 제향을 올린다. 사당 안쪽에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간을 가리키는 ‘오전 9시 30분에 멈춰 있는 시계’가 걸려 있다. 장흥군은 올해를 해동사 방문의 해로 지정했다. 장흥 정남진 전망대 앞에는 안 의사 동상이 있다. 안 의사의 손은 바다를 가리킨 채 서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중국 하얼빈 방향이다. 중국 하얼빈에 있는 안 의사 기념관과 해동사의 경도가 126도로 같다.

한 폭의 수묵화 풍경이 보이는 사자산
사자산에 오르면 득량만을 배경으로 천관산 등 능선이 켜켜이 쌓여 있는 수묵화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사자산에 오르면 득량만을 배경으로 천관산 등 능선이 켜켜이 쌓여 있는 수묵화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사자산(해발 666m)은 제암산(779m), 억불산(518m)과 더불어 장흥의 삼산으로 꼽히는 명산이다. 누워서 고개만 들고 있는 거대한 사자 모양을 닮았다고 해 사자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장흥읍 쪽 봉우리는 사자 머리를 닮았다고 해 사자두봉, 정상은 꼬리 부분으로 사자미봉이라 불린다. 제암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동서로 400m의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사자산에 오르면 남도의 산과 다도해를 한 장의 사진에 담기에 좋다. 득량만 앞바다와 주위 산들의 능선과 봉, 밭과 논, 장흥읍 등 발 아래 펼쳐진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와 같다. 예전에 패러글라이딩장으로 사용됐던 공터에 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독수리들이 원을 그리며 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연꽃 사이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보림사

해발 510m 가지산의 깊은 산자락에 있는 보림사. 봄소식이 전해지고 있는 보림사는 860년 신라 헌안왕 때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6·25전쟁 전까지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큰 절이었다. 하지만 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현재 천왕문과 사천왕, 외호문만 남았다.

보림사에는 귀중한 유물이 많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과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국보 제44호) 등 국보와 보조선사 창성탑비, 월인석보 제25권 등 보물이 있다. 삼층석탑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처럼 단조로워 보이지만 기단석에서부터 상륜부까지 손상된 부분 없이 원형이 고스란히 남은 드문 사례라고 한다.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하다. 1515년 만들어진 사천왕상의 몸 안에서 월인석보 등 370여 점의 귀중한 불교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절 안마당에서 주위 산을 둘러보면 산봉우리들이 연꽃을 닮은 것이 눈에 띈다. 연꽃 사이에 보림사가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대웅보전 앞에는 오래된 약수가 있다. 약수터 샘 안에는 몇 마리의 물고기가 보인다. 마실 수 있는 물로 물맛이 상쾌하다.

보림사 뒤에는 비자림 숲길이 있다. 수령 400년이 넘은 비자나무 7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로 난 흙길을 걸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바람 소리와 함께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봄을 부르는 맛과 향이 담긴 청태전
찻잎을 쪄서 엽전 모양으로 만들어 발효한 청태전.
찻잎을 쪄서 엽전 모양으로 만들어 발효한 청태전.
전남 보성이 차로 유명하지만 장흥도 만만치 않다. 바로 청태전 덕분이다. 차를 덩어리로 만든 고형차이다. 찻잎을 쪄서 찧으면 바다에서 나는 파래와 비슷한 색깔을 띤다. 일정 시간 마른 뒤에 구멍을 뚫으면 엽전 모양과 비슷해 청태전이라 불린다. 청태전은 고유의 우리 전통차로 삼국시대부터 장흥, 남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발효차다. 맛이 순하고 부드럽고 봄기운이 느껴진다. 숙취 해소에도 효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배앓이를 하거나 고뿔에 걸리면 청태전을 달여 마셨다고 한다. 억불산 아래 상선약수마을의 평화다원과 안양면의 다예원 등에서 청태전을 맛볼 수 있다.

팁+

△사자산 정상까지는 걸어서 2시간가량 걸리지만 편하게 올라가고 싶으면 9분 능선까지 자동차로 2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청태전을 맛볼 수 있는 다원에서는 청태전 만들기 등 체험 활동을 할 수 있다. 예약은 필수.

△천관산 동백숲 안으로 들어가면 햇볕이 들지 않아 추울 수 있으니 두툼한 옷을 챙겨가는 것이 좋다.

△아이들과 해동사를 방문하고자 한다면 미리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공부해 들려주면 좋을 것 같다.

글·사진 장흥=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전남 장흥#천관산자연휴양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