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합 넘치는 날 오길…” 조희대 대법관, 6년전 취임 되새긴 퇴임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일 21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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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을 퍼서 우물을 채우는 것처럼 당장은 효과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정의와 화합의 샘물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3일 퇴임한 조희대 대법관(63·사법연수원 13기)은 준비했던 퇴임사에 이런 구절을 적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3월 대법관 취임식 때 썼던 문장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며 6년 전을 되돌아 본 것이다. 조 대법관은 퇴임사를 준비하면서 주위에 “취임사 때 국민들에게 했던 약속은 그냥 한 게 아니다. 6년 동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 대법관이 준비한 퇴임사를 아무도 듣지 못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한 조 대법관이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퇴임식을 고사했기 때문이다. 동료 대법관들과 재판연구관들은 “후배 법관들이 볼 수 있도록 법원 내부망에라도 퇴임사를 넘겨 달라”고 했다. 조 대법관은 “조용히 떠나고 싶다”며 이마저도 하지 않았다.

임기를 마친 대법관들은 공식 퇴임식을 연다. 조 대법관도 당초 코로나19 사태를 고려하되 간소하게나마 퇴임식을 하고 대법원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세가 심각해지자 조 대법관이 “엄중한 상황을 고려해 달라”고 법원행정처에 요청해 퇴임식이 열리지 않았다. 주변에 간소하게나마 퇴임식을 열자고 3차례나 요청했는데도 조 대법관은 끝내 고사했다고 한다.

법관으로 근무한 마지막 날인 3일 오전 10시 조 대법관은 서울 서초구 대법원 11층 대접견실에서 김명수 대법원장, 동료 대법관들과 함께 차를 마셨다. 이 자리에서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며 6년간 대법관으로 근무한 소회를 얘기하고 인사를 나눴다. 조 대법관은 오전 11시경 동료 대법관들과 재판연구관들의 환송을 받으며 2층 중앙현관을 통해 대법원을 떠났다. 기념 촬영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선 “평판사보다 소박하게 떠난 대법관”이라는 말이 나왔다.

조 대법관은 퇴임 하루 전인 2일 소부 선고도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월요일에는 소부 선고를 하지 않지만 조 대법관이 “맡던 사건 중 끝낼 수 있는 사건은 끝내고 가고 싶다”고 해 이례적으로 선고를 진행했다고 한다. 조 대법관은 6년 동안 직무 관련 해외출장이나 지방법원 격려 방문도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재판을 우선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라고 한다.

경북 경주 출신인 조 대법관은 경북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86년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3월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의 지명을 받아 대법관에 임명됐다. 조 대법관 퇴임으로 박 전 대통령 시절 임명된 대법관은 권순일 박상옥 이기택 김재형 대법관 등 4명이 남았다.

조 대법관은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소수의견을 많이 내 ‘미스터 소수의견’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서는 “진정한 양심의 존재 여부를 심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지난해 11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방한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방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와 관련해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왜곡했다”며 제재가 정당했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올 1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선 대통령비서실이 특검에 제공한 증거들이 위법 증거라는 의견을 냈다. 조 대법관은 “수사권이 없는 대통령이나 대통령비서실이 특정인이 수사와 기소, 유죄 판결을 받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증거를 수집해 검사에게 제출하는 것은 수사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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