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공동체라는 이웃나라[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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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어려움은 우리의 어려움”… 우리의 어려움은 그냥 우리의 어려움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사드 보복’이 있은 지 3년이 지났지만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도 보복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롯데가 쫓겨나듯 철수했지만 유감 표명이나 해명조차 없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아 있다. 이번에 코로나19 확산 이후 한국인이 갑자기 중국에서 격리되고 물리적 위협까지 당하고 있지만 중국은 역시 모르쇠로 일관한다.

사드 보복으로 한국 유통업체들이 먼지털이식 소방·위생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를 당하고, 양국 항공협정에 보장된 한국 국적기의 전세기 운항이 일방적으로 불허됐을 때 중국 중앙정부는 지방정부나 관련 당국의 합법적인 행정집행이라고 둘러댔다. 당시 환추(環球)시보는 ‘한국이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게 할 필요는 없고, 내상만 입게 하면 된다’며 노골적으로 한국 제품 불매 운동을 선동했다. 중국 외교부는 개별 언론사의 기사에까지 관여할 순 없다고 했다.

이번에도 한국 교민들의 거주지가 봉쇄되고, 한국인을 보는 즉시 당국에 신고하라는 통지까지 떨어졌지만 중국 정부는 인민들의 자발적 안위조치 또는 지방정부의 사무일 뿐이라는 태도다. 환추시보도 어김없이 등장해 한국발 항공기를 엄격히 제한하고 모든 한국인 유입자를 격리해야 한다며 혐한 감정을 부추기고, 코로나19는 외교 문제가 아니라 방역이라는 대사(大事)이기 때문에 대충 봐주면 안 된다며 한국을 협박 중이다.

자칭 대국(大國)이라는 나라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 반(半)관영 황색언론을 동원해 자극적인 필설로 여론을 부추기고,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는 지방정부들은 일제히 안면을 바꾼 채 ‘법대로’를 주장한다. 1992년 양국 수교 이후 일찌감치 중국에 진출했던 기업인들에 따르면 1990년대만 해도 산둥성 웨이하이시에 100만 달러(약 12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하면 당서기가 직접 영접해 줬다고 한다. 이곳을 오가는 국제선은 지금도 한국 노선뿐이다. 그런데 지난주에 한국인 승객을 예고도 없이 가장 먼저 격리한 도시가 웨이하이다.

이런 나라에 우리 대통령은 취임 첫해 중국에 가서 한국과 중국은 운명공동체라고 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치적 구호인 중국몽(夢)에 대해서도 “중국만의 꿈이 아니라 아시아와 전 인류가 함께 꾸는 꿈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시진핑 시대 중국 외교 노선은 ‘신형 대국관계’와 ‘주동작위(主動作爲)’로 요약된다. 중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확인한 경제력을 외교 무대에 투사하고 있다. 과거의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름) 대신 ‘제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는 주동작위로 돌아섰다. 신형 대국관계는 아시아 일대는 중국이 관리할 테니 미국이 이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함의는 중국이 아시아 각국에 자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이 한국을 다루는 방식도 이 틀에서 이뤄지고 있다.

친중(親中) 정부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 중국을 감싸고도는 현 집권세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북핵과 경제 문제를 생각하면 중국과의 협력이 절실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중국은 한국을 운명을 함께할 파트너로 원하고 있을까. 화웨이 오포 샤오미 같은 중국 회사들이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던 7, 8년 전 우리는 “중국 기술력이 곧 한국을 따라잡는다”고들 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 산업계 인사들은 “우리는 이미 한국을 밟고 지나갔는데…”라는 반응이었다. 외교안보에서 대중 관계는 사드 이전과 이후로 확실히 갈린다. 중국이 한국에 기대하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다.

이번 수모로 한중 관계의 현주소를 재차 확인할 수 있었던 게 그나마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대통령은 “중국의 어려움은 우리의 어려움”이라고 했지만 우리의 어려움은 그냥 우리의 어려움인 그런 관계 말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코로나19#한국 교민 격리#친중정부#패권적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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