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개조’라고 쓰고 ‘독립’이라고 읽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0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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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2일


플래시백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 지구촌을 사로잡았던 단어는 다름 아닌 ‘개조(改造)’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인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 새로운 세계로 성큼 나아가는 방법이 바로 ‘개조’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도 1919년 3·1운동 때 이미 개조의 물결은 넘실거렸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세계개조의 대기운’이라는 구절이 나오고 1년 뒤 동아일보 창간사도 ‘각 방면에 해방과 개조의 운동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1919년 일본에서 잡지 ‘개조’가, 이듬해 한국에서는 잡지 ‘개벽’이 각각 창간됐죠.

김명식의 기명 칼럼 ‘대세와 개조’는 이런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역사를 볼 때 어느 시대, 어느 사회,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개조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종교와 학문 사회 경제 인권 정치 국제 등 각 분야의 역사적 사례를 종횡무진 열거해 자신이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지식을 뽐내면서 개조의 당위성을 역설하죠. 또 그는 사회는 변화하며 변화의 방향이 진보라는 사실을 볼 때 개조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개조로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사이비 개조’가 많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김명식은 강조합니다. 이상적이고 내면적이며 전체적으로 개조가 이뤄져야 하는데 과거의 개조는 권력이 주도하거나 피상적이거나 일부분에 그친 사례가 많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구미 각국은 개조가 필요한 약육강식의 무대였다고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14개조를 제창하고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파리평화회의가 열렸을 때만 해도 그 결과로 나타나는 개조는 과거와는 다른 ‘진짜 개조’가 될 것으로 누구나 기대했습니다. 김명식은 칼럼에서 ‘독립’이라는 단어는 ‘필리핀의 독립’을 말할 때 한 번만 사용했지만 내심 한반도의 개조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파리평화회의 결과 국제연맹이 창설됐지만 그 내용은 기대에 못미쳤습니다. 식민지 독립도 전쟁에서 패배한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수준에서 끝이 납니다. 김명식은 이 불만스런 결과의 책임을 이탈리아 오를란도 총리와 프랑스 클레망소 총리, 영국 로이드 조지 수상 등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렇지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부실한 국제연맹이나마 이상을 향해 오르는 계단이 됐다고 자위하죠. 이는 개조를 향해가는 세계의 대세가 아직 꺾어지지 않았다고 낙관하기 때문입니다.

제주 출신인 김명식은 당시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였습니다. 지금의 논설위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논설반을 이끈 장덕수 주간과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만났습니다. 김명식이 장 주간보다 네 살 많았으니 그때 30세였습니다. 유학 시절인 1916년 일본에서 한국 중국 청년 40여 명이 일제를 타파할 목적으로 결성된 ‘신아동맹단’에 두 사람이 함께 참여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아일보 논설반에 합류하게 됐다고 합니다.

김명식은 장 주간보다 나이도 많았지만 정열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글을 빨리 쓰는 속필인 것도 이런 성격이 반영된 듯합니다. 당시 사설을 장 주간과 사실상 번갈아 쓰는 상황에서 장 주간이 자기 글을 싣지 못하게 할라치면 “너같이 못생긴 자나 그것을 못 싣는다지, 누가 뭐라 할 것이냐”고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가세하면 전쟁판이나 다름없었고 사설이 제때 나오지 않아 신문 발행이 늦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하죠. 김명식은 창간 초기에 필화를 겪기도 합니다. 이 내용은 다음 기회에 말하기로 하겠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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