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거짓말[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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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1972년 6월, 미국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건물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에 5명의 괴한이 침입한다. 검거된 후 단순 절도라고 주장하지만 수사기관에 몸담았던 전력이 드러나고 거물급 변호인단이 붙자 워싱턴포스트의 신참 기자 밥 우드워드는 배후에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고 파고든다. 이들은 도청장치를 설치하려 했고, 압수된 수첩에서는 백악관 보좌관실 직원 이름이 발견된다.

11월의 대선을 앞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군 철수, 소련보다 앞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중공을 방문하고, 소련과도 군비축소회담을 열어 해빙 무드의 물꼬를 튼 데다 국내 경제마저 순항이라 지지도가 엄청났다. 민주당사 도청 사건은 완벽하게 덮인 채 재선에서 압승한다.

우드워드는 동료 칼 번스틴과 함께 증거를 찾아다니지만 CIA, FBI, 검찰까지 백악관을 비호하는 등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라 난관을 겪는다. 그런 와중에도 100% 사실이 아니면 기사로 쓰지 않는다. 모자란 퍼즐 조각을 찾으러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묻고, 설득하며 진실에 다가간 둘은 마침내 대통령이 연루된 사실을 폭로한다.

닉슨은 국민들 앞에서 자신의 연관성을 당당히 부인하며 증거 은폐를 위해 권력을 남용한다. 꼬리 자르기를 하고, 법무부 장관을 바꾸고, 특별검사가 자신을 궁지로 몰자 그마저 해임한다. 이 와중에 결정적인 증거물인 녹음테이프가 발견되지만 불리한 부분을 삭제한다. 결국 탄핵이 코앞에 닥치고 닉슨은 마지막 명예를 지키고자 사임한다. 새파란 20대 기자 둘이 목숨을 걸고 백악관과 대통령을 상대로 싸워 이긴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가 부패해도 기자들이 깨어 있다면 그 나라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 이 진리를 영화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일러준다.

미국인들이 닉슨을 비난한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 앞에서 대놓고 거짓말을 해서다. 미국은 거짓말에 엄격하다. 특히 가장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대통령에게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임한 대통령이 된 닉슨은 20년 동안 여러 권의 책도 내고 명예회복을 꿈꿨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명예스러운 대통령으로 남았다.

우리나라는 거짓말에 관대하다. 정치인의 거짓말엔 익숙해서인지 더 관대하다. 내 편의 거짓을 상대편의 진실보다 더 감싼다. 속은 걸 알면서도 계속 믿는 건 자신을 존중하지 않아서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자신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계속 속는다. 그 대가는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속아줄수록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무시하니까.

이정향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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