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엑소더스’ 외면하다 그리스 꼴 난다

  • 신동아
  • 입력 2020년 1월 26일 14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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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처벌 조항 2200개인 나라서 기업 하겠나
● 매력 없어진 한국, 기업·투자 탈출 현실화
● 규제 폭탄에 한국 떠난 솔베이(글로벌 특수소재 1위 기업)
● 최저임금 급등에 ‘오일쇼크’보다 무서운 ‘인건비 쇼크’
● “과장 갑질을 사장이 책임지는 나라 한국뿐”
● 기업은 글로벌인데 反기업 ‘운동권 논리’ 안 돼

미국 조지아주 기아자동차 공장. [동아DB]
미국 조지아주 기아자동차 공장. [동아DB]
“하나님, 기아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Thank you God for sending us Kia).”

과거 미국 조지아주(州) 기아자동차 공장 부근에 지역 주민이 붙인 팻말의 내용이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표현이었다. 기업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팻말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업은 자본과 노동을 결합해 생산·판매 활동을 하면서 일자리를 만든다. 부가가치와 세금을 걷을 재원도 창출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꽃이라고 볼 수 있다. 좋은 기업이 많이 생겨 발전하려면 기업 내적 역량도 중요하지만 외적 환경도 긍정적이어야 한다. 씨앗뿐 아니라 밭의 토양이 비옥하고 비도 제때 내려야 작물이 잘 자라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토양이 비옥해도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제대로 자라기 힘들다. 입지 조건이 중요한 이유다.

‘발로 하는 투표’로 한국 떠나는 기업들

좋은 인력이 공급되고 자본의 조달이 원활하며 제품을 팔 시장이 형성돼 있어야 기업이 잘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제도적 장치와 정부의 정책 기조다. 법인세 등 세금 문제, 전반적 규제 수준, 상장 유지 비용, 에너지 비용, 노동시장 유연성 등 법적·제도적 환경이 잘 갖춰져야 기업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한 기업을 국가적 수준, 나아가 세계적 수준으로 키우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줄탁동시(?啄同時)라는 한자어가 있다. 알 속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려 나오기 위해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한다.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이 ‘탁(啄)’이다. 안에서도 껍질을 쪼며 노력하지만 밖에서도 잘 도와야 병아리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

경제학에는 ‘발로 하는 투표(Voting by Feet)’라는 개념이 있다. 살기 좋은 지역에는 많은 사람이 이주해 온다. 부동산 가격도 오르고 세금도 잘 걷혀 환경은 더욱 좋아진다. 반대로 살기 힘든 곳은 주민들이 떠나 환경이 더 열악해진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직접적 행위로 의사표현을 한다는 점에서 투표에 비유된다. 해당 지역을 두고 ‘발로 하는 투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의역하자면 ‘행동을 통한 의사표현’ 정도가 된다.

이 개념을 기업에 적용하면 어떨까. 기업이 국내에서 기업 활동을 활발히 한다면 한국을 선호하는 ‘투표’를 한 셈이다. 반면 기업이 한국을 떠난다면 이는 ‘발로 하는 투표’를 통해 국내 기업 입지 조건이 악화됐다며 ‘행동을 통한 의사표현’을 했다고 봐야 한다.

우리 기업이 한국에서 성장했다고 마냥 국내에만 머물 것이라 가정하면 안 된다. 글로벌 경제 상황은 변한다. 좋은 기업을 끌어들이려는 각국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세금은 물론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해 자국에 좋은 기업을 유치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좋은 기업이 자리를 잡으면 일자리가 생기고 세금이 걷힌다. 또 기업이 입지한 지역이 발전해 해당 지자체와 국가에도 큰 도움이 된다. 한국도 기업 입지를 둘러싸고 다른 나라와 경쟁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입지 조건이 나쁘면 기업은 언제든지 한국을 떠날 수 있다.

최근 벌어지는 상황은 우려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 기업들의 해외 탈출, 즉 ‘기업 엑소더스(exodus·사람,자금 등이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일)’가 본격화하고 있다. 2018년 내국인 해외투자로 빠져나간 금액은 497억8000만 달러(57조8000억 원)다. 반면 외국인 투자로 국내에 들어온 금액은 172억 달러(20조 원)다. 해외로 나간 금액이 2.8배 더 많다.

또 하나경영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2019년 상반기 해외로 나간 직접투자 신고금액은 362억 달러로 2018년 상반기 대비 46.5% 증가했다. 제조업에 국한해도 2019년 상반기 해외투자는 전년보다 49억 달러 늘어난 117억 달러(13조6000억 원)를 기록했다. 특히 최근 1년간 베트남에 우리 기업이 설립한 신규법인이 859개로 미국의 544개, 중국의 485개보다 훨씬 많은 점도 우려스럽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지난 한 해 한국에서 해외로 나간 직접투자액 누계치는 2019년 3분기까지 444억5000만 달러(51조6000억 원)로 전년 대비 21.6% 증가했다. 2018년 해외 직접투자액이 497억8000만 달러(57조8000억 원)로 분기 평균액이 124억 달러(14조4000억 원)였음을 감안하면 2019년 한 해 총액은 500억 달러(58조 원)를 훌쩍 넘어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해외로 나간 아웃바운드(outbound) 투자액이 5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은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81년 이후 처음이다.

기업 유치 글로벌戰, 한국은 있던 혜택도 폐지

세계의 기업 유치 경쟁 속 한국의 입지 경쟁력 약화는 이미 가시화됐다. 이와 관련해 세계적인 화학기업 솔베이의 최근 행보가 뼈아프다. 솔베이는 1863년 벨기에에서 설립된 특수소재 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2016년 전북 군산시 새만금에 1200억 원을 들여 공장을 지은 바 있다. 최근 이 기업이 한국에 특수폴리머 파일럿 공장 설립을 검토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CEO(최고경영자)를 직접 만날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솔베이는 한국 공장 설립을 취소하고 싱가포르를 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주52시간 근무제와 화학물질관리법 등 화학물질 규제로 알려졌다. 또 정부는 신성장동력 산업에 투자하거나 외국인투자지역·경제자유구역·자유무역지역 등에 입주한 외국인 투자 기업의 소득세 및 법인세를 5년 또는 7년간 감면하던 제도를 최근 폐지했다. 이 점도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기업이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투자하는 이유와 주요 해외 기업이 한국에 투자하지 않는 이유는 일맥상통한다. 현재 한국의 기업 입지 조건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지적되는 항목이 노동 분야의 경직성이다. 세금 감면은 폐지되고 규제는 강화됐다. 특히 화학물질 규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스님이 다 떠난 절은 절 구실을 못한다.

그렇다면 기업이 떠나간 국가의 미래는 어찌 될까. 이런 점에서 그리스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을 만하다. 그리스는 제조업을 홀대했다. 친환경 정책을 내세워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제조업의 중추 중 하나였던 석유화학 관련 기업들마저 그리스를 떠났다. 결국 그리스는 해운업이나 관광업 등 서비스업 중심 국가가 됐다. 자연환경은 좋아졌을지 모르나 국가경쟁력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올리브 열매를 생산해 수출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좋은 올리브유를 수입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스는 2000년 초반 유로존에 가입했다. 다만 유로화 발행권이 아닌 사용권만 보유하는 조건이 붙었다. 유로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하지만 발행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지위를 부여받은 것. 이후 그리스의 경상수지 적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제조업 경쟁력이 시원찮으니 자국 제품 수출은 부진하고 외국 제품 수입이 급격히 늘어난 탓이다. 적자로 인해 해외로 유로화가 유출되지만 통화 발행권이 없으니 정부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 국채 발행을 늘렸다.

결국 그리스는 급격히 늘어난 국가 채무로 인해 2010~2011년 유럽재정위기와 함께 침몰했다. 지금은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유럽연합집행위원회·유럽중앙은행)’의 관리체제하에 있다. 갚아야 할 빚이 3600억 달러(약 418조 원) 수준이다. 게다가 좋은 자국 기업이 없으니 세금을 걷기도 힘들다. 그리스는 부채 상환이 어려워 재정과 연금을 축소하고 토지·항만 등 국가 자산을 매각해 버티는 실정이다.

그리스의 사례를 보면 좋은 기업이 국내에서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도 잘 내는 것이 국가 처지에서 매우 중요한 일임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국가경쟁력을 평가하는 지표를 보면 대부분 기업 입지 조건과 일맥상통한다.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고 조세·재정·노동·금융 분야에서 경쟁력이 있어야 좋은 기업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지금 한국 경제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 중 하나가 자본과 노동의 편 가르기다. 자본과 노동의 사이가 좋고 잘 결합돼야 기업이 제대로 운영된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노동과 자본을 편 가르는 듯하다. 사회적으로 친노동·친노조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정부가 노동계만 챙기는 분위기에서 친노동은 곧 반자본이 된다. 반자본은 반기업 정서와 맞물려 기업 입지를 방해하는 정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친노동과 소득주도성장의 구호 아래 최저임금을 급격히 인상한 것은 우리 경제에 큰 충격을 줬다. 이는 기업 입지 조건 악화로 이어졌다. 2017년 9월 우리 경제의 경기변동은 정점을 찍었다. 이 시점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다. 정부가 출범하고 곧 경기 하락이 시작된 셈인데 그로부터 2년 동안 최저임금이 30% 가까이 인상됐다. 기업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가장 취약한 자영업이 타격을 입고 중소기업과 일부 대기업에까지 부정적 영향이 확산됐다.

경기 꺾이는데 인건비 인상에 기업 ‘쇼크사’
지난해 2월 12일 전북 군산시 군산국가산업단지 한 폐업 공장 건물에 매각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지난해 2월 12일 전북 군산시 군산국가산업단지 한 폐업 공장 건물에 매각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인건비 쇼크’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원유가격이 갑자기 높아지는 ‘오일쇼크’는 에너지 비용으로 인한 생산비 인상으로 기업 경영을 악화시킨다. 마찬가지로 기업의 영업환경이 악화되기 시작한 시점에 정부가 갑자기 최저임금을 물가상승률의 10배 가까이 올리자 인건비 쇼크가 왔다. 인건비 상승 탓에 추가 생산비용 인상이 유발됐다. 여유 있는 기업이면 그나마 견디겠지만 형편이 어려운 기업은 쇼크사할 수도 있다. 식당 등 자영업 폐업이 늘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인건비 쇼크’로 인한 ‘경제적 쇼크사’의 피해자다.

이처럼 자영업자들이 힘들어지면서 신용불량자(금융채무불이행자)도 늘고 있다. 2017년 말 신규 신용불량자들이 갚지 못한 대출금 합계는 5조 원 정도였다. 2019년 말에는 8조 원에 육박하고 있다. 실물경기 부진이 금융 분야까지 전이되는 모양새다. 기업의 인건비 상승이 시장 상황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시행돼 기업 입지 조건이 악화했음을 방증한다.

또한 탈원전 정책에 따라 에너지 비용이 상승할 가능성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기업 입지 조건 중 높은 점수를 받던 요소 중 하나가 낮은 전기료였다. 이런 강점도 사라질 조짐이 보인다. 탈원전으로 인해 한국전력공사의 적자가 매우 심각해지고 있다. 콩(발전비용) 가격은 오르는데, 콩으로 만드는 두부(전기)의 가격은 그대로니 두부 생산자(한전)가 힘든 상황에 처했다. 결국 두부 가격(전기료)을 올릴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이 명약관화하다. 총선 이후로 미루고 있지만 전기료 인상은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법제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처벌하는 조항이 무려 2200여 개라는 지적도 있다. 필자는 얼마 전 한 세미나에서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을 만났다. 그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이른바 ‘갑질 금지법’을 예로 들며 ‘과장이 사원에게 갑질했다고 CEO를 처벌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수많은 임직원을 거느린 회사에서 직원 한 명이 다른 직원에게 ‘갑질’했다며 CEO의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으냐는 일침이다.

물론 기업에서 CEO의 관리·감독 책임은 중요하다. 하지만 CEO 처벌 조항을 2200개 만들고 기업의 투자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작정 처벌 규정을 도입하기보다 일단 글로벌 시장을 지켜보며 전반적인 규제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명분뿐 아니라 실리와 효율을 따지면서 기업을 규제하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발로 하는 투표’와 ‘행동에 의한 의사표현’이 지속되는 가운데 ‘기업 엑소더스’가 일어나면 결국 손해는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간다. 기업이 사라지면 일자리와 세수도 줄어든다.

기업을 ‘고객’처럼 대해야

국내에서 성장한 기업 일부는 이제 글로벌 기업이다. 다른 나라마저 이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단순히 한국 국적 기업이 아닌 그야말로 다국적기업으로 대접해야 한다. ‘내가 키웠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으로 기업을 홀대한다면 이런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을 떠날 가능성도 엄존한다. 이제는 ‘자식’이 아닌 ‘고객’으로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업을 고객처럼 대하고 눈높이를 맞추며 기업 입지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도 기업 친화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거 ‘운동권 논리’가 팽배한 시절, 기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널리 퍼졌다. ‘한국은 미제국주의의 식민지이며 한국 기업은 제국의 이익에 복무하는 매판자본(買辦資本)’이란 인식이다. 반기업 정서에 한몫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 이런 구시대적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한국이 키운 기업이 이제 다국적기업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정작 이들의 모국이 기업을 규제할 뿐 아니라 압박하고 폄훼해서야 되겠는가. 있던 ‘손님’마저 다 사라지기 전 ‘기업 엑소더스’ 현상을 무겁게 받아들일 때다.

윤창현
●1960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
●한국금융연구원 원장,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現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신용회복위원회 위원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前 한국금융연구원장 chyun@uos.ac.kr
[이 기사는 신동아 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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