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열풍[횡설수설/우경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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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고, 가장 비싼 상품은 상위권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 진학 코스다. 최근 A기숙학원이 경기 이천시에 재수생을 위한 기숙학원 의대관을 신설했는데 매달 330만 원이라는 비용에도 정원(784명)이 조기 마감됐다. 2020학년도 정시 전형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오로지 의대를 목표로 일찌감치 재수를 선택한 것이다. 의학전문대학원이 속속 의대로 전환하면서 2021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이 2977명으로 역대 최대로 늘어나게 되자 의대 열풍이 과열되는 양상이다.

▷상위권 학생의 의대 쏠림 현상은 2000년대 들어 유별나게 심해졌다. 의사처럼 보수, 안정성을 고루 갖춘 직업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 수는 한의사를 제외하고 1.9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3.3명의 57% 수준이다. 진료수가는 낮지만 1인당 진료 횟수가 많아 적정 수익이 보장되는 셈이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 사회적 존경도 따라 온다.

▷수능 공부 일년 더해서 평생 직업을 얻을 수 있다면 개인으로선 합리적 선택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선택이 모여 사회적으로는 인적 자원의 배분을 왜곡하는 것이 문제다. 똑똑한 인재들이 기초과학·공학자가 아닌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닥터헬기를 타고 중증외상환자를 치료하거나 응급실을 지키려는 이는 많지 않다. 돈 되는 전공, 수도권에 의사가 몰리면서 응급의학과·외과 등 필수의료 분야와 지방의 의사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바이오·뇌과학 등 신산업에 진출하는 의사도 턱없이 적다.

▷‘남편에겐 생명을 살리는 일이 자신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희생해서라도 해낼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어요.’ 설 연휴기간 과로로 순직한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부인 민영주 씨가 지난해 동아일보에 보내온 편지다. 고 윤 센터장의 가족이 내내 겪었을 내적 고통이 엿보인다. 의사가 헌신적인 영웅이 되기를 요구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생명을 살리는 본업과 멀어진 의사를 더 자주 만나는 현실이 정상은 아니다.

▷지난해 미국 갤럽이 가장 신뢰받는 직업을 조사한 결과, 간호사 의사 약사 순이었다. 이 순위는 17년간 거의 변동이 없다. 2016년 인하대가 직업의 가치를 존경도·신뢰도 등 척도로 평가했더니 한국에선 소방관이 1위, 환경미화원이 2위였다. 의사는 그 다음이었다. 20년 전인 1996년에는 의사가 1위였다. 의대 진학 열풍은 뜨거운데 사회적인 존경은 식어가고 있다. 업(業)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의사를 만나기 힘든 것이 그 이유일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의대#인적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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