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 일어나는 날, 도쿄의 하늘로 날아가리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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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독립공군의 꿈 쏘아올린 노백린
1916년 독립군 양성위해 美망명, 1920년 윌로스에 한인비행학교
‘쌀의왕’ 김종림 땅-비행기 제공

1920년경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학생들이 비행기 앞에서 촬영한 단체사진. 사진 출처 USC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
1920년경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학생들이 비행기 앞에서 촬영한 단체사진. 사진 출처 USC Korean American Digital Archive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차를 타고 2시간 30분가량 북쪽으로 가면 윌로스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이곳에 가면 비행학교로 사용됐던 낡은 건물이 있다. 100년 전 한국 최초의 한인비행학교와 훈련소로 사용된 곳이다.

‘노백린 군단’으로 불렸던 이 학교의 정식 이름은 ‘비행가양성소’.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의 군무총장(국방장관)으로 임명된 노백린(건국훈장 대통령장·사진)이 설립했는데, 1920년대 재미 한인들의 무력양성운동을 상징하는 곳이다. 박용만이 1910년대 군인양성운동을 이끌었다면, 1919년 3·1운동 이후 미주 지역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이는 노백린이었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대한제국에서 육군무관학교장 등을 지낸 그는 1916년 해외 독립군 양성을 위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에서 별동대 주임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육군 출신인 그가 비행학교를 세운 것은 재미 한인들의 충고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의 중요성을 경험한 재미 한인들은 독립전쟁을 위한 조종사 양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노백린도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1920년 7월 한인 농업의 중심지였던 윌로스에 ‘호국독립단’을 세우고, 부속기관으로 비행가양성소를 만들었다. 당시 벼농사로 크게 성공해 ‘쌀의 왕’으로 불렸던 김종림이 40에이커(16만여 m²)의 토지와 대당 4000달러에 이르는 비행기 3대를 제공했다. 김종림은 학교 운영에 필요한 연간 예산 3만 달러도 부담했다. 레드우드비행학교의 미국인과 한인 비행사들이 수석교관과 부교관으로 초빙됐다.

노백린은 군단에 지원한 청년들에게 “목표는 일본 도쿄다. 독립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으로 날아가 도쿄를 쑥대밭이 되도록 폭격해야 한다”며 철저한 훈련을 당부했다. 노백린은 1920년 7월 군무총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윌로스를 떠났다. 또 그해 11월 추수기에 발생한 대홍수로 벼농사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김종림의 재정 지원도 끊긴다. 결국 비행가양성소는 이듬해 4월 문을 닫았다.

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한 노백린 군단 출신들의 활약은 이어졌다.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박희성과 이용근은 1921년 임정의 육군 비행병 소위로 임관했고, 교관 이초는 2차 대전 말기 다른 한인들과 함께 미 전략첩보국(OSS)의 한반도침투작전 훈련을 받았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노백린#한인비행학교#김종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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