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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와인을 만듭니다[포도나무 아래서]〈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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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와인을 만듭니다[포도나무 아래서]〈44〉

신이현 작가입력 2020-01-07 03:00수정 2020-01-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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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이제 내 초등 동창생들이 여섯 명 남았다. 모두 스물넷이었는데 말이다! 작년에 셋 떠나버리고, 하나는 지금 병원에서 불려 갈 준비 중이다. 내 예감인데 내년 새해에 나는 여기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새해 별자리 운세를 봤는데 올해 너희는 무척 바쁠 것이라고 한다. 올해도 얼굴 보기 어렵게 되었다.”

새해가 되어 시아버님이 전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알고 있다고요!”, “뭐, 올해 내가 죽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아아, 아버님!” 우리가 이곳에 와버린 동안 아버님은 점점 더 빠르게 늙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님의 어두운 귀와 허약해지는 호흡과 심장을 걱정할 겨를이 없다. 프랑스를 떠나 한국에 정착한 지 3년, 많은 일을 했고 올해도 바쁠 것이라는 것, 운세를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레돔이 농부가 되어 와인을 만들겠다고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우리는 그 출발지를 한국으로 선택했다. 나의 이유는 단순했다. ‘이제 프랑스에서 작은 동양 여자로 늙어가는 것이 싫어. 프랑스어를 쓰는 것도 싫고. 똑같이 생긴 사람들 틈에서 같은 언어를 말하면서 살고 싶어.’ 그런데 이제 레돔이 다르게 생긴 사람들 속에서 다른 언어를 쓰면서 사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난 괜찮아. 그냥 농사만 지을 수 있으면 어디든 좋아.’


각자 소원한 것이 달랐지만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한국에 정착했다. 그 3년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레돔은 사과밭을 빌려 밤낮으로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었다. 와인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가? 주류허가를 받기까지의 서류란 맨땅에 곡괭이 하나 들고 석탄을 캐내야 하는 미션과 같았다. 허가 서류만 받았다고 술이 만들어지는가? 와인 제조에 필요한 온갖 기계들을 수입해야 했다. 수입은 아마존 하류 어디에서 소쿠리 하나 들고 시금석 쪼가리를 찾겠다는 미션과 같았다. 지금도 뭔가를 수입해서 세관을 통과할 때는 가슴이 벌렁거린다. ‘이것을 폐기 처분하거나 다시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제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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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찍은 레돔 사진을 보면 온통 일하는 모습뿐이다. 사람들은 코가 길쭉한 곱슬머리 외국인 노동자를 안쓰럽게 본다. 그의 농사법은 왜 그리도 고달파 보이는지, 그의 와인 만들기는 어찌 그리도 일이 많은지, 그는 매일 밤 푹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레돔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오히려 평화로워진다. 그래도 코를 골면서 꿀잠을 자니 참 다행이다 싶었다. 한 병의 와인, 그렇게 땀과 정성으로 만들고 나면 끝인가? 마케팅, 팔아야 한다. 나는 평생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가장 큰 문제였다. 충주 어느 작은 동네에서 소신껏 와인을 만들고 있는 어떤 프랑스 남자, 가끔은 죽도록 일하는 이 남자의 작은 와인을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에 3년이 지났다. 와인을 팔아 돈을 좀 벌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간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휴, 얼마나 고마운지!

올해도 새로운 와인이 술 탱크 가득 출렁거리며 뽀스락뽀스락 익어가고 있다. 레돔은 아기처럼 보살피며 저 술이 지난해보다 더 잘 익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저 술을 어서 빨리 누군가 다 마셔 줬으면 하는 맘이다. 그래서 테스팅(시음)을 이유로 내가 마구 빼내서 마셔버리기도 한다.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나는 가끔 잠을 설친다. 올해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레돔에게도 묻는다. “당신 이렇게 고생하는데 그래도 직업을 바꾼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 그냥 월급 또박또박 나올 때가 좋지 않았어?” 레돔은 후회하지 않는단다. 의미 없는 일을 하며 월급을 받을 때보다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는 지금이 좋단다. 죽도록 일해도 좋단다.

레돔은 올해도 바쁠 것이고 밤에는 코를 골며 곯아떨어질 것이다. 잠으로 한껏 충전된 아침엔 휘파람으로 새들을 불러 모아 해바라기 씨를 한가득 준 뒤 일을 시작할 것이다. 새들도 잘 살 것이고, 우리도 별일 없이 살 것이다. 우리는 전화기가 부서져라 새해 인사를 외친다. “아버님, 우리가 시간 날 때까지 사셔야 합니다! 내년 새해에는 꼭 뵈러 갈게요!”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와인#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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