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수첩→학습플래너→다이어리…나를 지탱해 주었던 ‘기록 병’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6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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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기록 병’을 앓고 있다. 집에는 매년 두 권씩 써 내린 다이어리가 한 보따리다. 작년 오늘, 재작년 오늘은 물론 10년 전 오늘까지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하물며 점심으로 누구와 무엇을 먹었는지 마저도 마음만 먹으면 모두 알 수 있다. 기록 없이 흘러간 기억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고 이내 손가락 사이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쓴다. 바득바득 기억하고 단물이 빠질 때까지 곱씹으며 추억화의 공정을 거친다. 물론,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성정은 아니다.

어릴 적 내겐 손바닥만한 ‘걱정수첩’이 있었다. 워낙 잔걱정이 많은 탓에 스스로 내린 일종의 처방이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적어둔 뒤 주문을 걸곤 했다. ‘그래, 저기 써 뒀으니까 까먹지 않아. 잊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열어보면 돼.’ 잊은 채로 신나게 뛰어놀다 열어본 수첩 속의 골칫거리들은 여지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유년시절 나의 ‘걱정 병’은 자연스레 치유되었다.

조금 더 자라서부터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유행하는 글귀나 문답, 혹은 스티커들을 예쁘게 전시해 놓는 진열장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덧 이는 습관으로 이어져 학습플래너로 발전했고, ‘오늘의 할 일’을 기록하며 옆에 끄적이던 ‘TV 좀 줄이자!’ 따위의 ‘셀프훈계’들이 ‘괜찮아, 할 수 있어!’ 류의 감상으로,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의 다이어리로 진화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다이어리 뒷장에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추가했다. 유럽 배낭여행 가기(대학생의 로망 스테디셀러다)부터 피아노 배우기(어릴 땐 그렇게도 싫어했는데)까지, 크고 작은 욕망들이 리스트를 가득 채웠다. 하나하나를 지워 나가면서 모종의 쾌감을 느꼈다. 리스트의 길이는 삶에 대한 의욕과 비례했다. 말하자면 버킷리스트는, 삶에 대한 갈증의 흔적임과 동시에 애정의 응축이었다.

그렇게 긴 세월을 거쳐 자리 잡은 것이 ‘멘탈의 보고’인 오늘 나의 다이어리다. 걱정이 생기면 적고 털어버린다. 기억하고 싶은 글귀나 To-Do List(해야 할 일 리스트)는 물론 스스로를 향한 꾸짖음과 위로의 말들이, 나의 온 정신이, 얇디얇은 노트 한 권 안에 빼곡하다. 그리고 여전히 제일 뒷장에는 버킷리스트가 자리 잡고 있다. 혼돈 손에 그 나름의 질서가 정연하다. 지금은 다이어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록 의존자가 되어버렸지만, 역으로 다이어리만 있으면 무엇이든 극복해 낼 수 있는 강철 멘탈이 되기도 했다.

새해의 첫 주말, 평소보다 이른 기상 후 책상 앞에 앉아 빳빳한 새 다이어리를 펼쳐 든다. 사뭇 경건한 마음으로 의식처럼 맨 앞 장에 좋아하는 글귀를 새겨 넣는다. 뒤이어 올해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하나하나 꾹꾹 적어 나간다. 새로운 시작을 그리는 이 과정이 퍽 즐겁다. 혹, 새해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그 목록에 기록 병을 추가해 보기를 권한다. 삶이 한결 정돈되고 풍성해질 것임은 두말할 것 없고, 수시로 찾아오는 멘붕의 여파로부터 나를 지탱해 주는 ‘믿는 구석’이 되어줄 것이다. 다이어리 님,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김지영 원스토어 웹소설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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